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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준신부님
고석준신부님
제목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사드립니다 날짜 2006.01.19 13:58
글쓴이 고석준 조회 977

황토, 황토, 황토. (荒土, 黃土, 皇土)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흙은 영어로 earth soil이다. 정관사 없이 쓰는 earth는 하늘에 반해서 땅이란 말이니 곧 흙이고, 정관사를 붙인 The Earth는 지구이다. 한자로도 둥근 땅 덩어리가 地球이다. 한편 soil에는 흙의 질을 말하는 토양이란 뜻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할 때 영어로는 earth를 쓰거나 soil을 쓰지 않고 dust를 쓴다. 먼지란 말이다. 흙에 물기가 담겨 있으면 진흙이 되고 찰흙이 된다. 진흙은 mud라고 하고 찰흙은 clay이다. dust란 흙에 물기가 조금도 없을 때 생긴다. 흙 가루이다. 물이 곧 생명일진대, 생명이 물기 없는 먼지에서 왔다면, 생명이 곧 無에서 有로 왔다는 것이다. 진화는 有에서 有에로의 변화이다. 창조는 무에서 유에로의 생성이다. 창조가 진화의 시작이다.


 


회교 국가의 이름 뒤에 붙는 ‘–스탄 이란 말은 땅이란 뜻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의 땅, 파키스탄은 파키들의 땅,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키의 땅, 키르기즈스탄은 키르기즈의 땅이다. 우리나라라면 고려스탄 쯤 되었을 것이다. 어쩐 일인지 이들의 땅은 earth가 아니라 dust이다. 이들 나라를 다 다녀 보았으니 나도 어지간히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딜 가나 그 땅이 그 땅이었다. 모두 흙과 먼지였을 뿐이다. 파키스탄의 땅도 그랬고, 우즈베키스탄의 땅도, 키르기즈스탄의 땅도 그랬다. 흙이 부서져서 먼지가 된 것인지, 이 먼지가 굳어져서 흙이 된 것인지 모른다. 그저 누런 흙 위에 먼지가 얹혀있다가 들썩거린다. 하도 곱게 빻아져서 밀가루 같아 모래보다 고우니, 黃砂가 아니라, 黃粉이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60년대 후반에 지지리도 가난했다. 그래도 서울은 나았지만, 시골은 더 못 살아서 정말이지 문화가 달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은 시로 승격되어 서울 만큼 사는, 경상도의 어느 지방에 그 때 내려가보니, 2차선 흙 길을 신작로라고 부르는데 길 양편에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손을 들고 서 있었다. 친구 집에 들어서니 동네 아이들이 서울 사람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친구가 아이들을 대접한다고,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설탕 가루를 쏟아 놓자, 아이들이 입을 대고 그걸 먹느라 서로 머리가 터졌다. 흙 먼지는 가난이다. 그즈음인가, 이 어령 씨가 내신 책 중에 흙 속에 바람 속에란 책이 있었다. 책들을 정리하는 통에 어디론가 가버렸지만, 참 소중하게 간직하며 읽고 또 읽던 글이었다. 그 서두인가,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흙 길을 걷던 아낙네가 Jeep 차의 경적에 놀라 허둥지둥 길가로 물러서 길을 비켜주고 그 차가 일으키는 흙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다시 걷는 모습이 있었다. 그 아낙네가 곧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아아, 참으로 가난한, 흙 먼지 뒤집어 쓴 우리나라였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 天刑이다. 임금이 머리를 풀고 하늘에 죄를 고하고 간청하는 것이 비다. 상위 사령부가 있는 칸다하르 기지에서 보니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마저도 누런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가지가 축 쳐진 것이 안스러웠다. 이곳 전진 기지에는 그나마 나무 한 그루 조차 없이 황량하다. 기지 안팎에 공사가 많아 채석장을 연상케 하는 정경이다. 하도 먼지가 나니, 먼지를 재우기 위해, 자갈을 가져다 깔아 놓았다. 포장되지 않은 헬기장은 자갈밭이다. 자갈이라고 하지만 흐르는 내 ()가 없으니 동글동글한 자갈일 수가 없다. 큰 바위를 분쇄기로 부수어 만든 거칠고 서툴고 모난 작은 돌이다. 그러나 자갈이 먼지를 이길 수 없다. 이 곳의 주인은 먼지이다. 먼지가 왕이다. 먼지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군복과 군화는 말 할 것도 없고, 그런 군화로 들락거리는 내 방 바닥의 먼지를 털어낸 적 없고, 쓸어 본 적도 없고, 그럴 엄두도 없다. 내가 들기 전에도, 아마도 이 방에 벽을 두르고 난 후 한번도 먼지를 쓸어낸 적 없을 것이다. 먼지에 두 손 든 방이다. 미국에서 지급 받아 한번도 입지 않고 잘 개켜 두었던 군복 겨울 내의를 정리하느라 꺼내었더니, 보기에는 멀쩡한데, 접고 개킬 때 마다 먼지 냄새가 풀풀 난다.     


 


기지에선 지하수를 끌어올려 허드레 물로 쓴다. 마른 땅 밑에 물이 있다는 것이 용하다. 부대 안에서 어디를 가나 발전기 소리를 듣는다. 발전기가 한두 대가 아니다. 이 전기로 지하수를 올리고 데운다. 그래서 부대 안에는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장과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식당 앞에는 간이 세수대가 있다. 지하수라면 다 생수인 줄 알았는데 여기 지하수는 맑지도 않다. 지층에 암반이 없어, 흙이 섞이나 보다. 미군은 이 물로 양치질도 하지 못하게 한다. 지하수는 그저 씻고 빨래하고 뿌리는 데만 쓴다. 씻고 씻어도 먼지 냄새는 어쩔 수 없다. 산뜻하게 머리를 감고 나오다가 바람 한 번 세게 일면 다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머리에는 흙 가루가 긁적거린다. 마시는 물은 중동 친미 국가에서 수입한 생수를 콘테이너 채 열어놓고, 이곳 저곳에 상자 채로 쌓아 놓고 마신다. 물이 곧 戰力이라 무제한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마을에는 이런 지하수 우물도 드물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살아 가는 것일까? 마실 물도 모자라니 씻지 않는 것은 틀림 없다. 부대에서 일하는 현지인 노무자들을 지나치려면 오래 씻지 않은 냄새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씻으나 마나, 감으나 마나, 빨래하나 마나, 마찬가지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씻고 나서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해도, 씻지 않은 것과 다르다. 씻으며 더러워지는 것과 씻지 않은 채 더러운 것이 그렇게 다르다. 같은 죄를 매일 반복해도 계속 뉘우치면서 짓는 것과 뉘우칠 줄 모르면서 죄 중에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천국과 지옥이 거기서 갈라진다. 고해성사는 손 씻듯 보는 것이지 오장육부 들어내고 갈아치우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얼굴 씻고 저녁에 발 씻듯 보는 것이지, 불현듯 대오각성하여 悟道頌 읊어대며 성형 수술하듯 한번에 뜯어 고치려고 덤비는 것이 아니다. 탁한 지하수라도 퍼 올려 자꾸 씻는 것이 덕행이요, 수행이요, 面壁跏趺坐이다.


 


이 메마른 땅에 일이 났다. 비가 오는 것이다. 매일 2번 있는 작전지휘소의 정례 브리핑에서 며칠 전 폭풍이 온다고 하더니 바로 이것이구나. 114, 오늘 아침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저녁 녘에 비가 내린다. 지난 며칠간, 해가 뜨면 초봄처럼 따뜻하더니 기어코 날씨가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질 때 그 작은 충격에 튀는 먼지의 냄새가 신선하다. 그런데, 이거야 참, 밀가루 같은 흙먼지가 비를 맞으니 마치 어설픈 밀가루 반죽처럼 되어 군화에 척 척 들러붙는 것이다. 황분이 난생 처음 비를 맞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다. 어디 군화 뿐이랴, 어느새 군복 바지가 진흙 투성이이다. 알링톤 국립묘지에서 의장대와 일할 때 배운 것인데, 옷에 젖은 흙이 묻은 것을 바로 걸레 같은 것으로 훔쳐 내려 하면 안 된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바싹 마른 흙을 솔로 털어내야 손질이 된다.      


 


옆에 있던 병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지 8개월 동안 3번 째 맞는 비라고 했다. 처음 비는 흩뿌리다 말았고, 두 번째 비는 땅의 겉을 살짝 적시는 듯 하다가 그쳤는데, 이번 비는 제법이라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뭄에 콩 나듯 오는 눈과 비는 겨울에 몰린다고 한다. 지난 1 1, 이 나라 거의 전역에 눈이 왔다. 이날, 미 공군도 예측하지 못한 기습 눈발에 항공망이 엉망이 되었다. 몇 시간을 날아왔다가 되돌아간 수송기도 있고, 용케도 눈을 피한 남부 Kandahar로 회항한 수송기도 있다.  


 


남부 지역 사령부가 있는 칸다하르는 1770년까지 수도 노릇을 하던 이 나라 제 2의 도시이자, 탈리반의 출생지요 고향이다. 파키스탄 이슬람 신학교 출신의 아프간 근본주의자들이 1994 9, 파키스탄과 접경인 이곳에서 탈리반을 결성하고 1996년부터 이 땅을 혹독하게 지배하였다. 탈리반이란 구도자란 뜻이다. 자비 없는 구도는 그런 법이다. 미군이 2002년 10월 7,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까지, 마지막까지 심하게 저항했던 곳이 이곳이고, 지금도 탈리반 잔당의 준동이 가장 잦은 곳이 이 지역이다. 히말라야 산맥이 이곳까지 가지를 뻗어 파키스탄과 자연스런 국경을 이루고 있는 산악 지대이다. 산이 험해 아무 곳으로나 넘을 수 없다. 지금의 파키스탄, 옛 인디아의 북녘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Khyber Pass라는 길이 53 km의 좁은 길이다. 가장 좁은 지점의 폭이 3m라는 이 통로를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넘었다.


 


수도 카불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연합군 사령부가 있고,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바그람에는 연합 합동 Task force가 있다. 연합 (Combined) 이란 다국적군을 말하고, 합동 (Joint)이란 육해공군 해병대가 함께 일한다는 뜻이다. 중앙 아시아 어느 나라의 미 공군 기지에서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로 향하던 C-130 수송기가 때마침 내린 눈을 피해 한참을 선회하더니 마침내 회항하여 칸다하르에 내리면서, 그 수송기에 타고 있던 나의 임지도 운명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마침 미 육군 군종 차감 준장이 바그람에 와 있었다. 이왕 내린 김에 아예 그곳을 맡으면 어떠냐? 다 정월 초하루에 내린 눈 때문이다. 최전선에 왔다. 瑞雪! 이헐게 꼬여서 결국 내가 알렉산더 대왕과 맞먹게 되는구나.


 


이곳 FOB, Forward Operation Base, 전진 작전 기지에는 지붕이 버젓한 건물 3동이 있다. 말이 그렇지, 여기서 건물이라는 말은 텐트에 비해 낫다는 뜻이다. 애초 잠시 쓰고 버릴 요량으로 지은 것이라, 온통 날림이다. 아예 쓰려고 지은 집이라기 보담, 쉽고 싸게 지으려고 지은 집이다. 지금 chapel과 의무실을 짓고 있는데, 그 짓는 꼴을 보면 세워질 꼴도 알만하다. 그래도 기지에서 제일 좋다는 건물에 내 숙소가 있다. 내 밑에 있는 대위 계급의 군목들은 천막에 산다. 쯧쯧. 일찍 기어 나오지. 천막과 달리 사방이 단단하고 반듯한 벽이라는 것 만도 어디냐? 그런데 내 방의 지붕이 그렇게 얇은 줄을, 비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야 알았다.


 


비가 조금 내리니 콘테이너 화장실이고, 간이 목조 숙소이고 어디든지 빗물이 샌다. 이런 건 차라리 천막이 낫다. 워낙 메마른 땅이라 방수나 하수에는 마음 쓰지 않고 집 짓기 때문이다. 내 방 앞 복도에도 플라스틱 쓰레기 통을 두 개나 갖다 놓고 떨어지는 빗물을 받는다. 겨울 비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다시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 심사인지, 건물 문을 잠깐 열었더니 비를 머금은 세찬 바람에 마음마저 스산하다. 하지만 화가 곧 복이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도 너무 건조한 방안의 공기에 못 이겨 잠이 깨어 물을 들이 마시고 콜록거리곤 하던 차에 이게 왠 호강인가 말이다. 천장에 비 내리는 소리에 빠져, 그리고 모처럼 방안을 맴도는 습기의 안온함에 녹아, 이대로 누운 채 밤새 이 복을 누리고 싶었는데, 그만 너무 쉽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그쳤는데 세상이 변했다. 기지 밖 작전에서 돌아 온 전술 차량들은 온통 진흙을 뒤집어 쓰고, 거기서 튀어나온 군인들은 마치 mud wrestler같다. 아프간 노무자들이 나무 판자를 내어다가 진창 길과 움푹 파인 곳에 깔고 있었다. 아마도 큰 보급품을 포장했던 나무 판자인 것 같다. 그러나 땅은 모처럼 잠을 깼다. 몸을 적시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하품하듯 큰 숨을 쉬고 있었다. 깊이 들이마시고, 한껏 내쉬고, 빗방울이 먼지를 씻어 내린 그 신선하고 촉촉한 대기를 받아들여, 허파를 씻어내고, 물의 기운을 자신의 내장에 불어넣고 있었다.


 


오후 작전지휘소 브리핑이 끝나면 거르지 않고 찾아가는 부대 안 체육관의 뒷문은 정서향이다. 땀을 흘리다가 그 문을 열면, 기지에서 유일하게 반듯이 포장되어있는 농구장에서 비번 군인들이 농구를 하고 있고, 그 뒤에 전술 차량들이 들락거리는 motor pool, 다시 그 뒤로 기지에서 몇 마일 떨어진 산맥을 넘어가던 석양이 내 눈에 걸려 멈칫거리고 했었다. 오늘 그 문을 여니, 농구장은 비어있고, Motor pool도 비에 질린 듯 조용하다. 이따금 빗방울이 흩뿌리지만, 바람은 멈추었다. 하도 신선하게 돌변한 공기에 오히려 당황스럽다. 지금쯤 지고 있을 해는 짙은 구름에 가리었고, 먼지 씻은 대기 속에 西山은 한결 가까운데, 비를 머금은 사막의 진흙이 정기를 내뿜어 나를 감싼다. 황토방이 뭐 어때서 건강에 어떻다더라. 천지가 황토의 기운을 뿜고 있었다. 저 진흙의 탕에서 뒹굴면 온 몸으로 생명의 기운을 받을 것 같았다. 먼지에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느님 만의 몫이지만, 저 정기 넘치는 진흙을 내게 주신다면, 그걸로 사람 모양을 빚어 놓기만 해도, 금방 살아 숨을 쉬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해 질 무렵, 운동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저녁 6에 문을 닫을 식당에서 미리 음식을 타다 놓는다. 미사 후에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평일이건 주일이건, 매일 저녁 6 30이니 서울은 이곳보다 4시간 30분 빠른 11이다. 서울과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런던의 시차가 9시간이니 이곳은 서울과 런던의 딱 중간이다. 한국 시간으로 치면 매일 밤샘 기도에 거의 자정 미사를 올리는 셈이다. 물론 임무 상 한번 밖으로 나가면 적어도 2~3일 걸려 돌아오니, 그때는 미사가 없다. 일기가 고르지 않으면 땅이고 하늘이고 교통이 끊기므로, 2~3일 예정이 6~7일을 넘기도 한다. 그래서 당일 귀환 예정이라고 해도 출동할 때 침낭부터 수통과 여벌 옷까지 모든 장비를 갖고 나간다. 어제 떠나려던 임무 출동이 날씨 때문에 연기되었다. 날이 궂다고 안나가는 것이 아니라, 헬기가 뜨지 않고 길도 미끄럽기 때문이다. 거꾸로 헬기나 covoy가 준비되면 날짜고 요일이고 상관없이  떠나는 것이다. 떠났다가 날씨에 걸려 돌아오지 못하면 기다리는 동안 노는 것이다. 논다고 말은 해도, 먼지 구덩이에서 자다가 일어났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거꾸로 매달려도 시간은 간다. 군대 생활 다 그렇게 하는 것 아니더냐?.


 


오늘 1 15, 연중 2주일 미사를 하러 나서니 다시 비가 내린다. 땅바닥은 이틀간 오락가락한 비에 젖어 이미 온통 진흙탕인데 길이 벌써 캄캄하다. 해꼬리가 서산에 희미하게 걸려있어도 산 밑 세상은 이미 캄캄한 밤이다. 가로등 하나, 건물에서 새어나는 불빛 하나 없기 때문이다. 진흙탕, 참 좋은 우리 말 표현이다. 진흙으로 湯을 끓여 부어놓은 것이다. 손전등으로 용케, 용케 자갈길과 판자길을 골라 가다가 결국 탕에 빠졌다. 척척 진흙반죽이 달라붙는 군화가 벌써 무겁다. 군인 신자들이 미사에 많이 빠졌다. 나 같아도 이런 날은 성당에 오지 않겠다. 겨울 비에 날은 스산하고 마음은 쓸쓸하고 텐트 자락 펄럭이고 낙수 소리 처량한데, 고향 생각에 신세 타령이 날 만도 하다. 이런 밤 초병에게는 훈장 몇 개 주어야 한다. 미사 내내, 어둠 속에 한결 세차진 바람을 타고 빗방울이 성당 천막을 두드려대는데, 나는 이런 정취가 좋아 미사를 하면서 신바람이 났다. 무당이 신들려 춤 추는 것을 보고, 신바람이라지 않는가? 이런 궂은 날, 손전등을 비춰 들고 진흙탕 속을 걸어, 흙 묻은 군복과 무거운 군화에 지친 몸으로 모여 와, 바람 펄럭이고 빗방울 때려대는 텐트에서, 권총 차고 장총 매고, 미사에 참례하여 집에 두고 온 가족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한 군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게 신나지 않을 수 없다.


 


11, 자리에 들려다가 아무래도 밖이 궁금하여 숙소를 나섰더니, 갑자기 땅이 훤하다. 어느 사이 비가 그치고, 엷어지고 흩어진 구름이 빠르게 달무리를 지나고 있다. 내일은 비가 그치겠구나. 어째 이번 비가 눈이 되지 않았나. 통계상 아프가니스탄의 1월엔 낮은 온도가 평균 섭씨 0도 정도라지만, 실은 훨씬 낮다고 한다. 바람이 세서 체감은 더 춥다. 야전생활은 아예 밖에서 먹고 자는 것이니까, 집에서 나와 차 타는 사이 잠깐 겪는 서울의 0도와는 다르다. 날이 개면 추어지겠다. 진흙탕이 마르면 황토의 정기는 사글고, 다시 먼지의 세상이 되겠지.  


 


그래도 됐다. 이 메마른 땅에 오자마자 이틀이나 비바람을 맞았으니 그게 어디냐. 이제 다시 비를 못 맞더라도, 나는 너 잠자는 皇土의 기지개를 보았다. 나는 네 숨에 쏘여 오래 묵은 정기를 입었다. 파키스탄과 북인도를 통틀어 호령한 무골 제국의 도읍이던 (1504-26) 이 땅의 眞骨을 보았다. 마녀의 주문에 걸려 개구리로 변한 왕자의 늠름한 모습이 잠시 비추인 것이다. 변용! 이 荒土는 黃土의 정기 넘치는 皇土이다.


 


기개 찬 말을 뱉으며 방으로 돌아 왔지만, 실은 비가 이틀 만에 개는 것이 그토록 아쉬워, 기어코 다시 밖에 나갔다. 이 높은 땅, 황량한 들판에 겨울 비 뿌리고 흩어져 무심히 달무리를 지나는 구름 조각을 바라보면서, 몸이 으시시 해지도록 한 자리를 서성이고 나서야, 돌아 들어와 몸을 뉘였다. 공기가 촉촉하니 오늘 밤에도 잘 잘 것이다. 내일 땅이 마르면, 모레엔 먼지가 다시 풀풀 거리겠지. 내일은 임무 차 아직 덜 마른 진흙 길을 떠날 지 모른다. 일찍 자야겠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허둥거리시던 어머니를 오늘 꿈에서 뵈어야겠다. 저 먼지를 옭아 맨 주문을 풀어 皇土의 위엄과 풍요를 살려 낼 사랑의 꿈을 꾸어야겠다. 먼지가 물을 먹었으니 정녕 생명이 감돌 것이다. 고마우신 하느님  


                         





방호벽과 철조망두겹뒤로 보이는 산밑마을





자갈밭 헬기장





흙을 담아 만든 방책





뒤에 보이는 천막이 사병들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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