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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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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티순교성지(배티교우촌-순교자들의 본향) 날짜 2006.09.18 11:14
글쓴이 관리자 조회 820

배티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고개라서 '배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충북 진천군과 충남 천안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면서도 북쪽으로는 안성-용인-서울로, 남쪽으로는 목천-공주-전라도로, 동쪽으로는 문경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지는 박해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 한 지형적 특성을 지닌 곳입니다.


 


배티교우촌-순교자들의 본향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13년경입니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지금의 홍성군 은하면 덕실리) 출신인 원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진천땅 '질마로'(백곡면 양백리의 은골로 추정됨)로 피신하였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된 사실이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후 베드로의 형은 배교함으로써 유배형을 받았으나 , 베드로만은 끝까지 형벌을 이겨내고 신앙을 증거한 뒤 옥사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후 1830년대에는 진천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배티 골짜기로도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정삼이골.절골.용진골.박래기.퉁점.동골.새울.은골.불무골.모니.소골.지구머리.지장골.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습니다.


 


  1866년 일난 병인박해가 약 7년 동안 계속되면서 배티일대의 교우촌은 수많은 순교자들(기록에 나타는 순교자 31명,유명.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는 순교자 26명)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치면서 다시 신자들이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나갔습니다. 


 


  1884년 이래 새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진천지역의 배티.삼박골.용진골.새울.굴티 이렇게 다섯 곳을 공소로 설정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배티공소는 1890년 이래 파스키에 신붕의 주목을 받아 '교리하교'가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인 성직자를 탄생시키는 성소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살던 많은 신자들은 일제시대 초까지 살다가 1930년부터는 하나 둘 떠나갔고, 현재는 새울과 백곡에만 공소가 남아 있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한국의 까따꼼바이며,


      스스로 찾아온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간


      신앙의 현장이며, 수많은 혈색 순교자와 백색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의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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