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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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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티순교성지(최양업 신부와 배티교우촌) 날짜 2006.09.18 11:32
글쓴이 관리자 조회 748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입니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입니다.  그느느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후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한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최양업 신는 위대한 목자요 백색 순교자입니다.


  1861년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사도.강원도를 순회하며 목자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죽은" 착한 목자입니다.  그는 매해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었고, 바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을 잤다고 합니다.  최 신부와 절친했던 페롱 권 신부는 그의 부음을 듣고 쓴 1861년 7월 26일자 편지에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최양업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와 교의사에도 지대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1847년 홍콩에서 [한국순교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로마로 보냈습니다.  이 문서가 근거가 되어 1859년 한국 순교자들이 교황청으로부터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고 그 중 79위가 복자 위에 올라 1984년 성인이 되셧습니다.


 


  1860년 한국교회가 최초의 교리서로 채택한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과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를 엮어 펴냈습니다.  특별히 최 신부는 보다 효과적으로 교우들에게 신앙을 북돋아주교 교리교육을 통한 전교의 목적으로 [천주가사]를 집필하였습니다.  천주가사는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간추려 조선후기의 대중가사인 사사조(四四調)의 가사체로 만들어 신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최 신부는 한국 복음화의 선구자요 토착화를 위한 선구자였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의 보금자리요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최양업 신부의 저술활동이 이루어진 유서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최양업 신부는 1852년 ~1853년 배티 교우촌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지어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삼고 전국을 순방하셨으며, 7월과 8월 장마로 길이 끊겨 공소 순방을 할 수 없을때에는 배티 사제관에 머루르면서 집필활동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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