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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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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가점, 아니 차쿠의 아침(1) 날짜 2016.04.05 18:27
글쓴이 관리자 조회 238

백가점,아니 차쿠의 아침

“선서, 나 차쿠 보좌신부 최양업 토마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법을 준수하며, 오로지 성교회의 진리만을 선포하고 가르칠 것을 선서합니다. 1849년 6월 21일 조선교구 탁덕 최양업 토마스, 서명해서 동봉하는 내용도 상기와 같습니다.”

백가점은 이제 공소가 아니었다. 차쿠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는 임기 말년에 차쿠와 백가점 일대를 사목구로 묶어 차쿠 성모설지전 성당을 건립했다. 양업은 이곳의 보좌로 선서를 하고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대건과의 추억이 가장 생생한 백가점 아니 차쿠, 4년 전의 밤 미역은 어제 우려도 신나는 것이었다. 먼저 서품을 받게 되었다며 무안한 얼굴을 들었을 때 반딧불이가 잔치를 열어주던 곳, 서로의 눈 속에서 보았던 인간의 본상. 그 여름밤 하나로도 특별한 장소다.

거침없이 만주를 달리던 대건은 충전을 위해 이곳을 찾았고 차쿠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시원한 냇물과 뜨끈한 아랫목으로 만주의 풍운아를 맞아주었다.

‘조선 의주(義州)까지 단 사나흘 거리이니 조선을 위한 거점 삼아도 될 것이 예를 들어 선교사들의 대기처로 쓴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기후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얼마나 안전한가. 조선교회가 저러다 씨가 마를 것 같으면 차쿠로 피하면 된다. 신앙의 용감한 증거야 붙들려 갔을 때의 일이고 성경에도 일단 옆 동네로 피하라지 않으셨던가. 국난 시 제삼국에 망명조정이라도 세우듯 군란(軍亂)이 창궐하면 아예 임시교구청으로 써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본국인 사제양성이 시급한 마당에 차쿠에 조선신학교라도 세우면 얼마나 좋을까. 멀리 홍콩이나 마카오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이는 실상 양업의 오래된 생각이었다. 조선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이 구상을 ‘조선교회 유사시 대책’으로 교구장에게 건의하고 싶었다. 현 주교에게 안 되면 차기 주교님께도 반드시 하리라! 신학교만 해도 첫 학생들이 천상의 우정으로 빚어진 곳이 아니냐는 생각에는 선서를 하면서도 또 대건을 회상하게 된다.

짝! 짝! 짝! 짝!

현지 만주교구장 직무대리도 선서식에 참석해 있었다.

“장 베르뇌 신부님도 축하하이! 보좌신부 생겼네?”

“보좌 주셔서 감사하고, 대리께서 친히 걸음해 주시니 더 기쁩니다.”

“이런 때라도 부지런히 다녀야 신부님들 얼굴 한 번 더 보지.”

1840년 요동교구에서 몽고교구를 분가시키며 교구명도 만주로 개칭한 베롤 주교가 3년 전 프랑스로 귀국한 후, 순번상 맡게 된 주교 직무대리 신부는 작은 행사들까지도 챙겼다. 관할구역이 단출해진 것도 있지만 실은 이웃 양관에서 발생한 마적의 피습사건 후 사제들을 대하는 마음이 절절해졌다. 원래 새 사제 최양업도 실습 후 양관 본당에 눌러 앉힐 계획이었다. 만주의 주교좌이기 때문이다.

석 달 전 한밤중,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창가가 벌게져 일어났더니 성당을 에워싼 횃불이 대낮 같았다. 말로만 듣던 마적 떼를 안마당에서 보았을 때는 몇 해 전 지방민에게 피살된 브뤼니에르 신부의 참혹한 주검부터 떠올랐다. 어림잡아 삼십 명이 되었는데 모두 커다란 말 위에 횃불을 들었고 또 잠결이라 일단의 군부대만 같아 보였다.

‘쐬~익!’

으악, 하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무지막지한 자가 삼국지연의 장비의 무기를 한번 휘둘렀다. 칼날이 위에서 아래로 소리를 냈을 뿐인데 문지기 유 서방의 머리가 두 자 이상 솟다 호박 덩이처럼 나뒹굴었다.

살육의 현장이었다.

콸콸 쏟아지는 그 비릿한 피가 바로 우리 유 서방의 목에서 그런다는 게 등골 서늘하게 했다. 뜨거운 것이 뚝뚝 떨어지는 칼날은 누구든 먼저 움직이려는 자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직무대리는 창밖을 훔쳐보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감아도 잘라진 머리에서 유 서방의 눈이 보였다. 쏘아보는 것 같다! 귀를 막아도 피투성이의 입으로 무어라 말하려는 것 같아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는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해 왔다.

“움직이지마! 달아나는 자는 이자처럼 될 것이다.”

아직 직무대리의 방까지 들이치진 않았지만 울타리를 치고 좁혀오는 것을 피할 길은 전무하다.

“대표 양인을 잡아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직무대리의 방 쪽을 보며 소리쳤다. 구조상 상전이 거주할 위치를 간파했다.

‘곧 들이칠 텐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순교라면 미리 각오라도 했을 텐데 곤히 자다 마적 떼의 급습이라니.’ 이리 같은 눈들을 보는 순간 직무대리는 사타구니에 힘이 빠지며 마음의 기둥도 무너져 내렸다. 이러다간 필시 망신당할 것이다. 교회의 대표가 되어 수하 신부나 직원들 앞에 떨게 될 것이 부끄러웠으나 야속하게도 오금이 저리는 두 발은 뗄 수도 없다.

“여기닷!”

그때였다. 두 명의 마적이 직무대리의 침실에 들이쳤다. 엉거주춤 서있는 이에게 한 방 날리려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지 뒤로 팔을 비틀었다. 두른 두건이 엉성한 것을 보면 마적인지 돈에 눈이 먼 주민인지 알 길이 없다. 칭칭 감아 돌린 것이 덜 어설퍼 뵈는 자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양인 대장 잡았다.”

“끌고 내려왓!”

교구청 신부들과 일꾼까지 열 명가량의 직원이 이미 속옷 바람으로 끌려나와 있었다. 무릎을 꿇리더니 살기 어린 눈빛들로 번들거렸다. ‘저들 앞에 나갈 때, 주님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직무대리는 화살기도를 바쳤다.

“여긴 돈 될 게 많다던데 지금부터 각자의 방에서 금은과 현찰을 모조리 가져온다. 우리가 찾아내면 방 주인 머리는 이리될 줄 알아라!”

마적 두목은 비교적 천천히 그러나 얼음장 같은 말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직무대리 쪽으로 오던 시선을 멈추었다. 어 이거봐라, 그가 말에서 내려 다가섰다.

“이 양반! 꼴 좀 보게, 천주교 대장 신부는 다를 줄 알았는데!”

그자는 직무대리의 목에 시퍼런 칼을 들이댔다.

“왜, 죽는 게 그리 두려워?”

“….”

“도 닦는 사람인줄 알았더니 봐!봐! 우리보다도 못하네!”

냉소와 함께 예리한 칼끝을 직무대리의 관자놀이에 대고 바로 눌렀다. 금방이라도 피가 터지려는 노 사제를 가지고 금은보다 끌리는 물건을 발견한 양 희롱하기 시작하였다.

직무대리는 생각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교회를 망신시킬 수는 없다. 주님 지난 허몰을 용서하소서.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이렇게 당신 품으로 갑니다. 지금 저의 체면이 아니라 교회의 품위를 위해서 이렇게 하고자 합니다. 죽기를 각오하자 자신감의 회복이란 마치 번개가 이쪽에서 저쪽을 번쩍하는 것처럼 빠르게 회복되었다.

“야이… 영감탱이야, 뭐? 사람들에겐 영원한 생명이 어쩌고저쩌고 떠들더니 막상 지가 당하려니 무서워, 아까워?”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집요하다. 자신들의 용맹이 말만 번지르르한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듯 악다구니를 썼다.

“겁쟁이, 어디 말 좀 해봐. 왜 혀를 좀 잘라줄까?”

“이보시게… 지금 목숨이 아까워 이러는 줄 아는가?”

자신감이 회복되자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금방 떠올랐다. 일종의 말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면 왜 벌벌 떠실까?”

“이게 떠는 것이냐?”

직무대리는 빙긋 웃어 보였다. 턱수염 위로 번지는 만면의 미소가 어둠 속에서도 힘차게 뻗어 나갔다.

“어어?”

어리둥절해진 것은 마적 두목 쪽이다. 갑자기 서양 늙은이가 변한 것이다. 방금 전만 해도 공포로 짓눌렸던 얼굴에 보름달이 떴고 칼을 압도하는 위엄이 차오르고 있었다.

“내가 떨었던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도 고통 때문도 아니다. 열 번 죽어 상관없네. 다만 이제 주님 앞에 나갈 텐데… 빈손일 것이니…. 그분 앞 셈해드릴 것이 변변치 못하다네.”

마적 두목이 듣기에도 그럴듯한 것이 생사까지 초월하는 고뇌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제대로 사는 일, 성인처럼 살아보는 것이다.’라는 직무대리의 말은 그의 귀에 ‘없애려도 없어지지 않는 생명이 있다. 인간에게는 죽음후의 생명도 있다.’란 소리로 들렸다.

점점 낯빛이 흐려지는 쪽은 마적 두목이었다. 만약 이들의 하느님이 진짜 있다면 자기는 어찌 될 것인가. 결혼도 안 하고 평생 좋은 일만 하겠다는 인생도 저랬는데, 자기 같은 부류야 느닷없는 시각을 어찌 맞을 것인가, 모든 것을 맡기고 초연해지는 대리의 얼굴일수록 두목은 자꾸 쪼그라들었다.

“야들아, 여긴… 아무래도 재수 없다. 종교 물건은 손대지 말고 돈과 금붙이만 챙긴다. 피도 더는 보지 않는다!”

처음부터 살인하자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직무대리 신부는 그때 생각만 하면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덤으로 주신 삶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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