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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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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가점, 아니 차쿠의 아침(3) 날짜 2016.04.05 18:32
글쓴이 관리자 조회 205

“홍홍 씨.”

범 요한은 이제 서른이 넘은 소팔가자 청년 중 최고참이었다. 어렵게 이름 석 자를 불렀건만 바로 대답이 없다. 네, 한번 해주면 얼마나 뛰어오를 것인가. 늘 그런 투로 얇은 입술을 오므린채 무심만 하다. 범 요한과 홍홍이 연인도 남도 아니게 살아온지도 2년이 넘는다.

양업이 소팔가자를 떠나고 그 겨우내 주일도 안 나오다 부활절에야 모습을 보인 홍홍은 많이 여위어 있었다. 청년 성가대 부단장직도 내놓을까 했는데 ‘얘, 너는 사람보고 신앙생활하니, 하느님 보고 하지?’하는… 야속한 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맡고 있는 실정이었다. 내내 두문불출하고만 싶었는데 부활 며칠 전 십자가에 달리신 분 위에 양업의 얼굴이 겹쳐졌던 것이다. 부제님…잘 계신 거지요? 늘 잘난 체하시기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부활 때부턴 다닐게요, 그렇게 다시 시작한 신앙생활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범 요한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양업 이야기를 꺼내주었기 때문이다.

범 요한 쪽에서도 고마운 것이 그 이야기라면 걸음을 멈춰주었고 눈에 졸음기가 가시었다. 그렇게 양업의 빈자리를 달래가며 슬슬 만나오는 정도, 좀처럼 좁혀질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먼저 감정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 나이 차가 여덟 살이거니와 액면대로 말했다가는 영 만나주지도 않을 수 있다. 고맘때의 여자 애들이 질려버릴 정도로 일방적인 감정임을 모르지 않았다. 다행히 교량 역할을 해주는 양업의 근황에 한껏 귀를 세웠다. 그래야 한 번이라도 마주해 볼 수 있었다.

2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흘러 홍홍도 과년한 처자였다. 소팔가자에서 스물두 살 처녀라는 것은 가족들로부터 어지간한 압력을 받고 있음이다. 일 년 중 가장 괴로운 날이 명절, 온 친척이 동원돼 “언제 시집가느냐?”라고 채근을 해왔다. 실상 왜 시집가기 싫은지 홍홍 자신도 몰랐다. 얼마 전 부모님이 정해놓은 혼처를 죽기 살기로 거부해 놓고도 왜 그러는지 자문해 보면 막상 뚜렷한 답도 없었다. 누가 동북 여자 강단 아니랄까 지난번처럼 단식투쟁으로 나오면 딸자식 하나 아예 잘못될까, 부모도 여기저기 친척이나 부추겨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녀원에 가볼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는 문제다. 그러나 막상 어디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언제부터였는가, 범 요한에 대해서 조금 호감이 생겨났다. 여섯 척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도 뚜렷한 것이 왕년에 여자깨나 울렸다고들 하지만, 또 장닭이 암탉들 사이를 뻗정다리 걷듯 이성들을 대해온 흔적도 있지만, 가끔 청년들과 어울릴 때면 못하는 운동이 없고 노래면 노래, 술이면 술, 그렇게 뜨거운 빛을 하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바로 떨어뜨릴 때는 그 나이에도 귀여운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양업의 길동무였다는 것이 끌렸다. 재작년 이후 양업에 관한 소식은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는데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최신이었다. 그럴 적마다 성당 마당의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서 몇 번 만났다. 합석도 않고 서서 하는 양업 얘기가 고작였지만 범 요한, 이 남자는 어쩐지 가깝게만 다가오는 대상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화병이라도 나시고 끝내 수녀원도 정하질 못해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범 요한밖엔 없질 않은가, 이런 꿍꿍이가 전혀 없지를 않았다. 그래도 시종 상냥하고 싶지는 않다.

“홍…홍 씨.”

문디 빙신처럼 또 말을 더듬고 만다. 멍추이, 하며 얼굴도 못 쳐다보고 발등만 내려보는 동안에도 홍홍은 묵묵부답이다.

“사실 저… 최 부제님, 아니 이제 최 신부님이지?”

“네?”

붉고 가느다란 입술이 마침내 열린다. 맑은 음성에 범 요한의 머리까지 말개져 무슨 얘기를 하려 했는지도 생각이 안 났다.

“뭐라고 하셨어요? 최 신부님이라고요?”

“신부님이…되셨는데예… 첫 미사에 다녀… 왔심더.”

“정말요? 그래요? 건강은 하세요?”

“예….”

그녀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다, 폭발적이다. 그러나 이제 양업에게 질투심은 일지 않는다. 범 요한에게도 가장 가깝고 싶은 두 사람이었다. 그녀가 양업으로 인해 저토록 끌린다는 하나 때문에 더 이상 속상하지 말자고 했다. 오해 건도 오해 건이었지만 삼각관계를 이겨내는 일치 이론에 그토록 확고했던 양업이 아니었던가,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은 갑과 을이 사랑해도 병이 소외되지 않는다는 인간관계론을 지지하고 싶다.

“어디 계시는데요?”

“아직까진 상해 계실끼라예.”

네에… 하는 홍홍이 범 요한의 눈언저리를 훔쳐본다. 처음으로 눈치라는 것을 살핀 것이다. 범 요한이 말을 이으려다 입술을 억지로 꾹 깨물기 때문이다.

“어쨌던 그게… 지는… 계속 상해에 계셨으면… 좋겠심더.”

‘우르르 꽈꽝!’

그때였다. 6월 말의 소팔가자 기후는 변덕스러워 대평원에 먹구름이 일기도 전에 갑작스런 천둥소리였고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조선의 소나기보다 기습적이라고, 언젠가 양업도 그랬었다. 후두두둑! 나뭇잎도 가려줄 수 없을 만큼 굵어졌다.

“어… 우짜지예? 홍홍 씨!”

“….”

“금방 안 그칠 것 같은데, 성당으로 가까예?”

“….”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정문을 향해 뛰었다.

“이거 우야노? 문이 잠겼네!”

소팔가자 성당 정문은 현관이 없고 비를 막아줄 덮개지붕도 없이 민 벽에 문짝 하나 달려있을 뿐이다. 이러다간 비 맞은 생쥐 꼴이 될 텐데 워낙 감기를 달고 사는 홍홍이었다.

“우짜지, 조 앞에 원두막에 가까예?”

“….”

홍홍은 머리만 끄덕일 뿐이다. 백여 미터 앞 길가에 있는 원두막이야 소신학생 서 마태오네 것이다. 부모와도 안면이 있으니 비 피할 장소로는 그만이다.

“옳지!”

범 요한은 윗저고리를 벗었다. 아침에 나올 때 웃옷 하나 껴입고 나오길 천만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 이건 옷 우산이라예.”

“네?”

범 요한은 대답 대신 윗저고리를 활짝 펴 홍홍의 머리 위에 씌운다. 빗방울이 옷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후두둑, 경쾌하다. 때로 소년 같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그 나이 되도록 좌충우돌 두리번거리는 젊음으로 상갓집 강아지 모양 킁킁거리다 이내 생활 속에 묻혀버렸던 빛이 끝내 대상을 제대로 만나서는… 일시에 아이로 돌아간 눈빛이었다. 그것을 본 홍홍은 일단 안심이 되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가만있었다. 서른 살 된 사람이 저리 맑을 수도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뛰입시더!”

“네….”

피식 웃으며 네, 라는 대답까지 해준다. 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물기 머금은 수선화 잎새 같다. 두 뺨이 청초히 만발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원두막으로 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맞추어 가는 발자국소리, 머리 위 저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입술로 새나오는 앙증맞은 숨소리, 그리고 가슴 쪽인 듯 심장 팔딱이는 소리, 고인 물 튀어 나가는 소리, 다시 또 천둥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대자연의 바이올린도 되고 첼로도 되고 피아노와 오보에 클라리넷도 되다가, 어울려 솟구쳐 오르며 서로를 쓰다듬기도 전에 사방에 흩어져 나간다. 빗물 교향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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