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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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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가점, 아니 차쿠의 아침(4) 날짜 2016.04.05 18:33
글쓴이 관리자 조회 484

범 요한은 처음으로 홍홍을 제대로 보았다. 뛰고는 있지만 정지 순간을 그려놓은 것처럼 하나하나 부분 그림으로 연결된다. 푸웃, 홍홍도 그렇게 웃어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긴 다리로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가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우스꽝스러웠을까. 가끔 그녀의 하얀 상의와 팔 어깨 같은 신체들이 가까이 닿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제 찌릿,말초신경만 자극되어 오지 않는다. 오랫동안 몸의 부분이었던 것처럼 따스함으로만 달래주다 일말의 불결한 생각까지를 우려내 빗물에 씻어내고 있었다. 새하얀 상의 안에서 출렁이는 그녀의 흉부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몸보다 가까워지고 있을 심리적 간격일 것이다. 가끔 멀리서도 야릇하게만 다가오던 융기보다 더 부푸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잠깐만, 슀다 가입시더.”

워낙 잎새가 무성한 방울나무 밑이라 그래도 좀 나았다.

“….”

생긋 웃을 뿐이다. 막 빗물에 씻긴 초록 이파리들이 마주 보는 두 사람 뒤로 싱그럽다.

“자아!”

범 요한은 다시 웃옷을 머리 위로 펼쳤다. 온 거리만큼 더 가면 원두막이지만 부러 느릿느릿 뛰고 싶고 고마 이렇게 세상이 딱 멈추어 버렸으면 한다. 지금은 그토록 원하던 홍홍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몇 걸음 앞을 보고 있지만 내면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자신의 하늘이었다. 잔뜩 흐려져 비를 뿌리고 있음에도 속으로 열리는 구름 한 점 없는 한ㄹ, 범 요한은 거기 대고 무언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더. 하늘이시여, 그동안 못난 모습으로 살아서. 욕심 부린 것 죄송합니더. 지나치게 외로워한 것 죄송합니더.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해 죄송합니더. 자신을 너무 깎아내린 것도 죄송합니더. 거친 생각 수많았던 원망들, 그래서 어두웠던 시간들, 절제하지 못했던 욕망들, 탐주 탐식들 다 죄송합니더. 뿌연 먼지가 씻기듯, 갓 품 안에 피어나 연분홍으로 떨려오는 꽃내 같은 것들이 오랜 땟국을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원두막이 코앞에 있었다.

“홍홍 씨… 원두막이!”

“….”

“근데… 사다리가?”

“…네?”

홍홍의 얼굴이 발개졌다. 2년 전 양업 앞에서 벌게지고는 그럴 일이 없었던, 그렇지만 가장 그녀다운 색깔이다.

“없는데 사다리… 우야노?”

“….”

“엎드릴 테니, 제 등을 밟고 올라가이소!”

“네?”

“예!”

범 요한이 머리를 끄덕이며 땅바닥에 손과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안 돼요, 제 발에 흙이….”

“그라믄 우째예? 괘안심더. 얼른….”

“한번 해볼게요!”

홍홍은 풀을 뜯어 발에 묻은 흙을 깨끗이 닦아내었다. 그러고도 미안했던지 한 움큼을 더 뜯어 등짝에 올려놓는다. 그 위에 한 발을 딛고 원두막에 앉으면 될 일이다.

“엄마!”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녀에겐 등짝마저도 높았고 비에 젖어 미끌미끌한 것은 올라서기도 힘들었다. 몇 번을 해 볼 때마다 이를 어째, 하는 중에도 콰르르 쾅쾅! 천둥소리 끝의 소나기는 인정사정없이 내릴 기세였다. ‘항상 사다리가 있었는데 오늘따라 누가 누가 치워버렸는가. 우짜노….’ 범 요한 같으면 뒤로 바닥을 짚고 껑충 뛸 것도 없이 걸터앉으면 끝이지만 홍홍에겐 한뼘 차이로 불가능한 높이다.

“요한 씨….”

그 성스러운 입에서 직접 이름이 불린 것이다. 예, 하지도 못하며 그녀를 본다.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어, 어떻게 생각하다니. 범 요한은 지난 5년을… 그랬었다.

구름에 막 빠져나온 달을 볼 때나 바람이 이렇게 잎을 흔들 때, 푸우 아무렇게나 나온 한숨 끝에 먼 데를 보다가도, 석양이 당신 이름맨치로 붉게 떨어질 적엔 그 창문가로 달려가 ‘저것 좀 보이소!’하고 싶었다. 고향 사천(四川)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죄송스런 부모님께 문안할 짬조차 없었음도 그대 하나로 벅찼기 때문이다. 언덕 위 들꽃이 덮이는 봄의 오후와 여름밤 고요한 대양 위를 가르는 범선을 꿈꾸면서도 그대의 얼굴만 흰 돛처럼 나부꼈다. 바스락 가랑잎 밟는 소리에도 북녘 삭풍소리에도 그대는 잔 숨처럼 코끝에 새근댔다. 그라모… 그쪽은 지를 우찌 생각해예, 라고 되묻고 싶었으나 어느 구석에서 올라왔는지 모를 뜨거운 열이 안면 가득히 뼏쳤다. 어지간한 술에도 이러진 않을 건데 아니, 얼굴 상태가 어떠할 거란 것도 이젠 둘째다. 당장은 어디론가 확 내빼고 싶은, 그러나 절대 달아나지 말아야 할 상활과 맞서야 한다.

“그 대답을 우찌… 지가….”

빙신 문디가 또 언어장애를 앓는다고 자책했다.

“요한 씨….”

대신 그녀가 눈을 감았다. 턱으로 뒤쪽 원두막을 가리키더니 두 팔을 어깨에서 조금 벌려준다.

“이… 이… 우짜믄 좋노, 지가 어떻게….”

홍홍이 눈을 감은 채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은 자기를 반짝 들어 아니 최악의 경우 안아서라도 원두막에 앉혀주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리라, 틀림없다.

“참말로… 그럼… 쬠만… 기다….”

범 요한은 추녀 밑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씻었다. 씻고 또 씻었다. 그러고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아 비빈다.

“자 그럼….”

범 요한의 떨리는 손이 홍홍의 겨드랑이로 향하였다. 시야에 새하얀 상의만 가득 차는 순간에도 ‘허리 윗부분 쪽에는 근접도 말아야 한다.’며 홑이불 같은 몸을 수직으로만 들어 올리는데…. 그래도 그녀의 앞부분이 자신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고 말았다. 몽실 녹아내리는 것이란 따스하게 피어오르다 등짝까지 사무쳐간다.

“죄송합….”

범 요한은 홍홍을 원두막에 앉히자마자 부리나케 밭고랑 쪽으로 내달았다. 조생종 수박은 벌써 머리만 한 크기로 지천에 널려있었다.

“잘 익었나 모르겠네예.”

범 요한은 홍홍을 원두막에 앉히자마자 부리나케 밭고랑 쪽으로 내달았다. 조생종 수박은 벌써 머리만 한 크기로 지천에 널려 있었다.

“잘 익었나 모르겠네예.”

애꿏은 수박이나 내려쳐 퍽하고 갈라지는 붉은 조각을 내밀며 겨우 얼굴 드는 시늉을 해본다.

“이건, 나중에 밭 주인에게 자수하겠습니더.”

홍홍도 푸웃, 하고 웃는다. 수박보다 빨개지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다시 흰 돛 같은 뺨에 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그라믄 그쪽은 절 우찌 생각하시는데예?”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이었다. 다른 여자들한테는 그렇게도 제멋대로였는데 왜 이리 숙맥이 되는지 모른다.

“저는요… 다른 사람은… 아직 없거든요.”

예에… 하고 깍듯한 존대라도 나가야 그 쿵쾅대는 것을 어찌해 볼 것이다.

“오늘 비가 갑자기… 좀 그렇지예?”

홍홍은 대답 대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물어왔다.

“요한 씨, 전에 신학생이었다는데… 아직 생각 있는 거예요?”

“예… 뭐… 그기… 생각대로 됩니꺼? 불러주셔야지… 아무래도 전 아인 것 같심더.”

“최 부제님, 아니 최 신부님 얘길 더 해줘요! 첫 미사 때 어땠어요?”

“글쎄요, 미사 중에…뭘 보셨는지… 사로잡히시는 기라예. 성체를 들어 올렸을 땐 내 숨도 턱 막히던데…. 끝나고 대화 좀 나누려 했는데 손님들이 억수 많아서… 분명히 홍홍 씨 안부 물었을 텐데….”

“저 같은 걸 뭘요….”

“아이라, 눈빛이 그러던 것 같든데….”

“어떤 눈빛였는데?”

“그게요… 요한 씨, 그래 홍홍이랑은 잘 되어갑니…?”

말을 잇는 대신 수박 한 입을 크게 물었다. 홍홍도 따라 한 입 베어 문다. 양업을 얘기하다 막상 둘의 관계로 진전되려면 이내 끊겨버리곤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 말 않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점점 편안해졌다. 그렇게 누구도 깨지 않기를 바라는 침묵이 흘렀다.

“저기 봐요, 무지개네!”

홍홍이 손을 들어 가리켰을 때야 무지개 같던 침묵이 깨졌다.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는데 정말 소팔가자 성당에서 만주 평원쪽으로 무지개가 선명히 걸려있었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더.’ 범 요한은 감사란ㄴ 두 글자밖에는 없었다. 오랫동안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던 여인과 나란히 무지개를 볼 수 있다니 인생에 이런 날이 있는가 싶었다. 무지갠 약속이란 뜻이지요, 가뜩이나 감상적이 되는 데다 홍홍의 말에 용기가 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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