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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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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가점, 아니 차쿠의 아침(8) 날짜 2016.04.05 18:38
글쓴이 관리자 조회 490

“…제대로 해야 합니다. 요한 씨….”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요한 씨….”

“…내가 어시서든 지켜볼 겁니다. 요한 씨….”

그 밤이었다.

4년여 전 여름밤, 아직도 백가점 공소 제대 밑에서 하던 김대건 부제의 간곡한 당부가 쩌렁쩌렁하다. 아니 지금은 귓속까지 들어앉은 것만 같다.

“어? 김 부제님이… 이 밤에… 웬일로 저를.”

당시 곤히 자고 있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건 부제였다.

“요한 씨 긴한 이야기가 있소. 공소로 올라갑시다.”

“아까 저녁 드시고 최 부제님과 밤 미역 가지 않으셨어예?”

“방금전에 돌아왔습니다.”

“그럼 최 부제님은요 지금?”

“옆 방 보니까 뭘 쓰고 있는 것 같던데…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얼추, 자어 넘었지예?”

“….”

그때 그랬었다.

고개만 끄덕이던 대건은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단잠을 깨워 미안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라고 했다. 아닌 밤에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간 백가점 공소 안에서 김대건 부제는 대뜸 이렇게 물었었다. “요한 씨… 양업 부제 사랑합니까?”

예, 두 조선 부제님들 우연히 만나 필연이 되었심더. 내겐 두 분이 다 같습니더, 라고 말하려 하는데 대건 부제의 격앙된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그냥 즉흥적이 아니라 오래 심사숙고한 듯했다. “이거는 내 처음이자 마지막 간청입니다. 당초 저와 함께 다니던 요한 씨를 양업에게 보낸 것도 언젠가 이럴 때가 올것 같아서였습니다. 우린 피차 비장한 시간들을 살고 있으니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요한 씨… 양업 부제 사랑하잖소?” 이때부턴 차라리 애절하게 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다음에 양업 부제가 말입니다. 사제품을 받으면, 그 서품식 어디서 하든지 상관없고 그때 참석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서품을 박고 혹시…양업 새 신부가 이 백가점에…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대건 부제는 그 대목에서 굴꺽 침을 삼켰었다. 범 요한이 되레 다그쳐 물어야 했다.

“백가점에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예?”

“그때는 요한 씨가 나서줘야 합니다. 반드시!”

“뭘예?”

“도와주어야 합니다. 양업의 조선 입국을.”

“훗날 그리되리란 걸, 김 부제님이 우찌 아신다고?”

“내가 지금껏 조선으로 들어가는 육로 해로 다 알아봤는데… 결국 해로가 막힌다면 이 길밖엔 없습니다. 여기서 대기하다 압록강 얼면 의주로 들어가는 길밖엔!”

“그래서예?”

“이게 내년이 될지 5년 후가 될지 누구도 모릅니다. 양업이 새 신부가 되어 백가점에 왔다면… 해로가 막혔다는 뜻이니까… 틀림없이 여기서 대기하다 조선에 입국하겠단 소립니다.”

“아!”

범 요한은 그때 움푹 팬 대건 부제의 눈언저리를 보았다. 쑥 들어간 것이 딱해 보일 정도였다. 천하의 김대건이 누구인가, 자존심 세기로는 누구도 못 당했다. 원래 수년 전 에리곤호에 탑승할 때 대건과 동행하려 했다. 그럴 적에 의도적으로 밀어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기한테 오지 말고 양업을 도와주라고 했던 그런 사람이 불쌍한 몰골로 애원이란 걸 해오고 있었다.

“예에….”

“도와주실 거지요? 요한 씨밖엔 없습니다.”

“알았심더.”

급한 성격도 있지만 뭔가 쓸모 있어졌다는 생각에는 덜컥 대답부터 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라믄, 우찌 도와주면 되는 건데예?”

“압록강 감시망을 뚫을 때… 잘 건너도록 해주는 겁니다.”

“으음… 그런 거라면… 억수로 위험하겠네예?”

“….”

대건은 이번에도 차마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요한 씨… 이것은….”

“아니, 이건?”

“스승 르그레주아 신부님이 주셨던 목걸이 십자고상입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더니?”

“이다음… 목숨보다 소중한 대상을 만났을 때 주시….”

저한테야 지금은 두 부제님밖에 더 있겠습니꺼, 라고 말하려다 범 요한은

“이거 지한테 주는 겁니꺼?”

라고 물었다.

“고마움의 ㅍ시로 미리….”

“이거… 안 받으면… 안 되겠어예?”

아무리 잠결이었어도 십자목걸이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알았심더 김 부제님, 그기 글키 중요한 일이라믄 내 우야든 동 해보겠심더! 두 번 죽겠심니꺼? 아무튼지 그기는 겨울이 되겠네예?”

“암록강이 얼어야 합니다.”

“….”

“요한 씨, 우리끼리 암호로 양업 부제의 입국 계획을 ‘백가점의 아침 작전’이라 합시다. 그리고… 십자목걸이 얘기는… 양업 부제에겐 비밀입니다. 목걸이의 의미를 아니까요.”

“비밀… 지키겠심더.”

1845년 한여름 밤, 자다가 불려나가 얼결에 그런 약속과 십자목걸이를 주고받은 범 요한은 한참을 공소 제단에 꿇어있었다. 대건 부제와 함께 나오려 했는데 뭔 기도가 긴지 통 일어나질 않았다.

그 후… 4년도 넘게 별생각 없이 지내오던 두 달 전이었다. 백가점 아니 이제 본당으로 승격된 차쿠에서 한 행상이 기별을 가지고 왔다. ‘대건 신부님 그런 아배까지 해놓으셨을 줄이야.’ 지난 5월부터 차쿠에 조선의 새 신부 최양업이 와있다는 말이었다.

‘아이쿠 올 것이 왔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되는 것은 눈앞에 떠오른 홍홍 때문이었다. 바로 그녀 때문에 양업이 서품 후에도 상해나 홍콩 같은 데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했다. 그냥 차쿠에 가지 않았으면 했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봄엔 치를 혼사였다. 추석을 앞두고 그녀의 집에 인사를 다녀왔고 본당 신부에게도 명년 늦봄이란 말을 넣을 터였다. 정말 낙원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홍홍의 손을 잡고 있으면 그녀도 점차 사랑이라는 신천지로 걸어 나왔다. 목숨보다 소중한 대상에게 주라던 목걸이를 받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할,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사랑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내 것도 그녀 것도 아닌 것이 얼마나 성스럽게까지 만드는지 몰랐다. 사랑 자체이신 한 통 속에 같이 빠져서는 영혼까지 젖어버리는… 남녀의 한계 밖 외계로부터나 강림하는 축복이었다. 그래도 열매는 두 사람 안에 주렁주렁하니 스스로 들여다 보기에도 경탄스러웠다.

‘결국 이러시려고 달콤한 시간을 주셨노?’

양업이 차쿠에 와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이런 말부터 튀어나왔다. 하늘을 보았다. 우찌했으면 좋겠습니꺼, 라고 묻지도 못한다. 당연히 그래야지, 라고만 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시여. 지금 이 여인은 그렇습니더. 저에게는 저보다도 더 그래서예….’ 그런데, 그럴 때마다 연실 웃어오는 대건 신부는 홍홍의 그것처럼 사람 설레게 하는 것으로만 그득했다.

소슬바람이 불자 대건 신부는 밤마다 꿈속에도 나왔다. 차라리 요한 씨 그전에 한 약속을 지킵시다, 하는 위협조였으면 나중에 벌을 받더라도 ‘이 여인만은 어쩌지 못하겠습니더. 정말 안 되겠심니꺼?’하고 매달려도 볼 텐데. 그러나 대건 신부는 시종 웃고만 있었다. 완푸에서 십자목걸이를 잃어버린 일까지 개의치 말라는 얼굴이다. 가뜩이나 결벽증이 있는 범 요한에겐 웃음마저 부담이 되어 한 달이나 끙끙 앓았을 것이다.

“홍홍 씨 이번 겨울에 제가 다녀올 데가 있심더.”

“네? 갑자기….”

“오래전 약속된 일입니더.”

“안 가면 안 돼요?”

‘그대가 깊이 두고 있는 최양업 신부님 도우는 일임더.’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니 제대로 해야지 이번엔 한번 제대로 해봐야지, 하는 작심은 “출발은 모레 아침입니더.”라고 해버리게 했다.

홍홍 쪽에서 보기에 범 요한이 조금 이상했을 것이다. 직감이 그랬다. 신학교 업무차 서너 달 출장 다녀오는 일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예사롭지 않은 게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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