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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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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관겸(1739~1799 프란치스꼬) 날짜 2005.05.27 11:40
글쓴이 관리자 조회 418
배관겸 프란치스꼬는 충청도 당진 지방의 진목성(현 장항리) 태생으로, 이 벽(요한)이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자마자 입교한 사람이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지방에서 박해가 있었을 때, 그도 여러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아직 신심이 굳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배교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풀려났었으나 이내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보다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외교인들로 인하여 신앙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을 떠나야만 하였다. 고향을 떠난 프란치스꼬는 서산 고을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다가 다시 여러 교우들과 함께 면천(沔川)의 양제리로 이사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활동을 하게 되자, 1798년(정조 22년)에는 그 곳에 신부를 모실 생각으로 ㄷㅇ료들과 상의하여 강당을 한 채 마련하였다. 그러나 주신부는 이미 박해의 손길을 피하여 이리저리 숨어다니고 있었으므로 프란치스꼬의 희망대로 충청도 교우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 그 지방에는 조화진이라는 배교자가 와 있었는데, 그는 왕의 밀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서지방의 교우들을 밀고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조화진은 면천 고을에 살고 있는 프란치스꼬와 다른 교우들을 찾아내어 본관에게 고발하여 그들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1799년 10월 3일(음력) 프란치스꼬는 마침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 당하였다. 관아에서는 그를 배교시키는 동시에 천주교인들을 밀고하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게 하려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훌륭한 신앙심은 잠시도 흔들리지 아니하였으며, 더구나 교회에 관계된 어떠한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은 뒤 그는 원 야고보 등의 교우들이 고통 당하고 있던 청주로 이송되어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게 되었다. 여러차례의 혹심한 고문으로 그의 몸에서는 살이 헤어져 너덜거리게 되었으며 팔과 다리의 뼈는 부러지고 드러나게 되었다.
그가 옥에서 지낸 마지막 생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가 영웅적인 인내로 고통을 참으면서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던 중 그는 더 이상의 매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였는데, 때는 1799년 12월 13일(음력)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프란치스꼬가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들 배청모(아우구스띠노)도 체포되어 다른 옥에 있었는데, 포졸들은 이 아들로 하여금 프란치스꼬의 시체를 갖다 묻도록 허락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부친의 시신을 장사지낸 후 도피하여 종교 서적을 베끼는 일을 다시 체포되어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29년(순조29년) 6월 26일(음력 5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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