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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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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항검(1756~1801 아우구스띠노)-1 날짜 2005.04.13 11:19
글쓴이 관리자 조회 415
1756년, 지체가 그다지 높지 않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은 덕망이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또한 많은 재산으로 인하여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전주 고을 초남이(현, 전주 서북의 조남)에서 살고 있던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그 교를 신봉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평판에 이끌려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양근의 권씨 집안을 찾아갔다. 이때 독실한 신자인 권일신(사베리오)이 유항검을 인도하여 천주교에 입교시켰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여러 차례의 박해를 거치는 동안 많은 순교자를 낸 집안으로, 동생 유관검은 그와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에, 장남 유중철(요한)과 차남 유문석(요한)은 1801년 11월 14일에, 그리고 부인 신희와 조카 유중성(마태오),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등은 1802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집안이 매우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신앙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구스띠노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유항검은 곧 성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 많은 가족들을 가르쳤으며, 또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도 이 훌륭한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러한 그의 열성과 항구한 마음은 이후 그가 남쪽 지방에 있는 천주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787년경 열심한 교우 권일신(사베리오), 이승훈(베드로), 정약용 형제 등은 복음의 전파를 보다 쉽게 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끼리 교계 제도를 설정하였다. 달레의 [조선 천주교회사]에서는 이때를 일컬어 "임시 준성직제도 시대"라고 한다.
유 아우구스띠노도 신부로 임명되어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임지로 내려간 그는 그 곳에서 설교하고 세례도 주고 고백성사와 견진성사도 주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준 성사는 무효였지만, 이러한 성직 수행으로 인하여 새로운 신앙의 전파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 후 여러 가지 교회 서적을 정독한 결과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즉시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신부들의 지시를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성사 집행의 부당성을 알게 된 후 그들은 평신도의 위치로 되돌아가 열심히 전교에 힘썼으며, 북경으로부터 주교의 회답이 전해지고 부터는 모든 의심을 떨쳐버리고 열심히 활동하였다.
한편 또 다른 주교의 편지에 적혀 있는 미신과 조상 숭배에 대한 결정은 일부 조선 교우들에게 배교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교에 젖어 있던 그들은 조상숭배가 하느님 숭배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교리와, 한편으로 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국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두 가지 문제 사이에서 고민했으며, 혹 마음이 굳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의 교리를 저버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우구스띠는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의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윤지충과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읽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를 겪고 난 후,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켜 다시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보좌하였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모셔온 신부님을 박해로부터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우들은 그때 성사를 마음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비밀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박해는 교우들 사이를 계속 파고들었으며, 1801년 1월에 이르러 대왕대비 김씨는 새로운 윤음을 반포하고 신유박해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신해박해 이후 1801년까지 전라도는 매우 평온하였고 천주교인도 매우 많아졌다. 전라도 지방에 이렇게 빨리 복음이 전파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아우구스띠노였으며, 이에 그는 박해의 대상에 제일 먼저 오른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침내 3월에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감영으로 끌러간 아우구스띠노는 먼저 감사의 준엄한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감사는 그를 다루기에 마음의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관할의 이름난 토호로 중앙에 출입이 잦은 사람을 그저 죄인으로 다루기에는 좀 곤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의 엄한 명령이 있어 감사는 위엄과 절차를 갖추어 첫 심문에 임하였다.
"조정에서는 너를 중죄인으로 잡아 단단히 심문하고 이 기록을 속히 조정으로 보내라 했으니,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다른 죄야 있으리오만, 소인이 천주교를 믿으니까 혹시 그것을 죄라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학을 믿는 것도 크게 국령을 거스르는 죄이겠지만, 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들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어디 그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보라."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백성이 되어 제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가지고 조정의 중신들이 오해하거나 왜곡을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언비어라니? 나는 금시초문인데, 좀더 자세히 말해 보라."
"실은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아끼시어 국태 민안(國泰民安)하였는데, 노론측에서 천주교를 사학이니 금수지도니 하여 교인들을 전부 없애려고 갖은 모략으로 상소를 올리며 임금님을 괴롭혔습니다. 이때 임금님께서는 천주교인을 다 죽이는 것보다 우리 동양의 정학, 즉 유학에 힘쓰면 사락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하시면서 그들의 극단적 반대를 무마하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애매한 백성을 다치지 않도록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정권이 그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반대파의 인물들을 타도하는 구실로 사학을 신봉하다고 몰았고, 이제 와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역적으로 몰아 일거 양득의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저 같은 사람도 그런 무리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오판한 데서 이런 분부가 내려졌는가 합니다."
"지방의 감사로서 나는 그러한 당파나 사학의 진가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만 나라의 명령대로 직책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데 네가 서양인을 청해오는 데 비용을 많이 부담하였으며, 몰래 외국인을 입국시켜 사도를 널리 전하게 하였고, 그 외국인을 너의 집으로 안내하여 여러 날 묵게 하면서 각지에서 모여든 교인들에게 사학을 가르쳤다는 것이 사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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