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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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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중철(1779~1801 요한) 날짜 2005.04.20 11:43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1
유중철(요한)은 1779년 전라도 전주 부근의 초남이(현, 전주 북서쪽의 조남)에서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신유박해 때 대부분이 처형을 받은 순교 일가였는데, 부친인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은 1801년 10월 24일에, 동생 유문석(요한)은 그와 함께 1801년 11월 4일에, 그리고 모친인 신 희와 숙모 이육희, 부인 이순이(루갈다), 사촌 유중성(마태오) 등은 1802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집안에서 일찍이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던 터라, 요한도 어려서부터 성교의 진리를 깊게 믿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그는 천주교 신자라 하여 탄압과 질시를 받았으나, 집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버리지 않았으며 더욱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동정을 원하게 되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왕족의 후손이며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한 이순이 또한 천주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의 원의를 자세히 관찰한 주문모 신부가 이들의 문제를 깊게 검토한 후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결합을 주선하기에 이르렀다.
유 요한의 집안은 비록 양반이고 매우 부유하였으나, 이 루갈다 집안에 비하면 그 지체가 훨씬 낮았다. 게다가 그 집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이들의 결합은 매우 힘든 문제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혼배라는 외관 속에 이 두 마음을 결합시켜 그들의 뜻대로 남매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일을 마무리하는데 성공하였다. 과부인 루갈다의 모친이 기꺼이 동의하여 혼인이 결정되었다.
이런 일을 알게 되자 루갈다 집안의 외교인 친척들은 크게 노하였다. 그들은 불평을 커뜨리고 비난을 하며, 그들 눈에는 몹시 부적당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계약을 깨기 위하여 힘을 합하였다. 루갈다의 어머니는 그들의 아우성을 잘 견디어냈다. 그는 과부로서의 자기 처지가 어렵다는 것과, 그로서는 큰 부잣집 사위를 얻는 것이 이롭다는 등등의 구실을 내세웠다. 차츰 폭풍우는 가라앉아 1797년 혼배가 거행되었고, 이듬해 9월에는 요한의 집으로 가서 함께 동정 서원을 하였다.
결혼한 후에도 요한의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과 굳은 신앙, 열렬한 애덕은 변하지 아니하였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부인 루갈다 역시 착하고 덕스러운 아내의 모범으로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온 이웃에 향기를 풍겨 그 덕행이 남편에 못지 아니하였다. 순결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들의 고귀한 마음은 행복을 얻을 수 있었으며,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이러한 점은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쓴 옥중 서간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제가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에 저는 모든 불안의 대상이었고 모든 날의 걱정이던 것을 쉽게 얻었습니다. 우리는 동정지킬 것을 맹세하고 4년동안 남매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 동안에 우리는 열 번 가량 유혹을 받아 하마터면 모든 것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간구한 보혈의공으로 마귀의 계략을 피했습니다."라고 유혹을 이겨내고 동정을 지킨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801년 3월, 요한은 부친 아우구스띠노와 몇몇 다른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곧 전주의 옥에 갇혔는데, 동생 유문석(요한)이 줄곧 이 곳을 왕래하며 형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다고 한다. 다만 의복만은 전할 수가 없어, 그는 삼복 더위 중에도 체포될 당시에 입고 있던 겨울옷을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땀에 절은 옷에서 나는 냄새와 이로 인한 몸의 종기는 곱게 생활하여 온 그에게 진정 가혹한 형벌이었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언제나 칼을 쓰고 있었고, 처형 때에야 비로소 그 칼을 벗을 수 있었다 한다. 그럼에도 요한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신앙만을 위하여 견뎌내고 있었다.
요한이 옥에 있은 지 몇 개월 후, 이번에는 부인 루갈다와 나머지 식구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부친 아우구스띠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관례에 따라 즉시 그의 두 아들을 교수하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10월 6일, 금부도사 한 사람이 이 판결을 시행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파견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1801년 11월 14일 유중철은 동생 유문석과 함께 전주의 옥중에서 교수를 당하여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훗날 그의 옷 속에서는 누이(요한은 평소에 루갈다를 이렇게 불렀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여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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