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회원가입  |  로그인  |  사이트맵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일반자료실
일반자료실
제목 이경도(1779~1802 가롤로) 날짜 2005.04.21 14:08
글쓴이 관리자 조회 442
1780년 서울에 사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경도(가롤로)는 태종의 첫번째 아들인 경령군의 후손이었지만, 이미 여러 대째 왕족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 안에서는 대단히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남인에서는 지도층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부친 이윤하는 조선에 [천주실의]를 소개한 이수광의 8대 후손이었으며, 어머니 권씨는 열성적인 교우 권일신의 동생으로, 가롤로는 바로 권일신의 생질이었다.
이미 천주교와 관계가 깊었던 집안이라 가롤로도 일찍부터 그 진리를 믿고 있었다. 그는 '오희(五喜)'라고도 불려졌으며, 서울 한림동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이 어느 정도 열성적인 교우였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으나, 1785년 권일신 등과 함께 조선 교회 창설기에 활약하다가 발각되었을 때 형조로 달려가 빼앗긴 성상과 서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부전자습'이라 하여 그가 아들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서 이를 신봉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천주교 교리에 열심이어서 자녀들을 신심으로 기르는 데 일생을 다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지극한 교욱을 받은 누이 동생 이순이는 1802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 이경언(바오로)은 1827년 7월 5일 악형으로 옥사하였다.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가롤로도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웠으며, 뛰어난 재질과 진보적 학문으로 뭇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또한 집에 보관되어 있던 천주교 서적들을 일찍부터 읽고, 이를 마음 속에 새겨 신봉하고 있었다.
부친 이윤하가 1793년에 사망하자, 장자였던 가롤로는 14세의 어린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 당시 양반의 집안에서 상을 당했을 경우 장자가 하는 역할이란 미신 행위를 주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기와 결단을 가지고 그 미신 행위에 협력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속을 멀리하고, 자기와 같은 젊은 사람이 당하는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로 꼽추 행세를 하며 하느님께 그러한 병을 주시도록 간청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몸을 구부리고 몹시 힘이 드는 것처럼 걸어 다녔다. 차츰 그의 등뼈는 어그러져서 앞으로 굽어졌고, 다리도 약해져서 나중에슨 사람들에게 들려 다니기에 이르렀다.
17세에 결혼한 그는 큰집의 가장으로 집안을 인도하기에 힘쓰며 모든 것을 질서있게 처리하고 아랫사람들을 가르치며 교우들의 체통에 어긋나는 행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열심한 교우였던 황사영과도 친분을 맺어 매년 한두 차례 그의 집을 방문할 때면 함께 천주교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외교인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며, 쓸데없는 이야기나 오락에 끼어 들지도 아니하였다. 이렇게 근신하는 생활을 한 까닭에 아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책망을 받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신앙의 결심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특히 누이동생 루갈다의 결혼에 친척들의 비난이 더욱 거세어질 때 그는 어머니와 함께 집안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견뎌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가롤로는 곧 체포되어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순전히 천주교인이라는 명목으로 문초를 받고 사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그는 순교하기 전날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하직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지금 판결문을 확인하고 글월을 올립니다. 이제 이 큰 죄인을 주님의 깊은 은혜로 불러주시니 저는 통회와 사랑릉 간직하고 죽음으로써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석과 같아 아직도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그러니 아무리 천주의 무한한 인자하심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그분의 무서운 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곰곰이 생각하건대, 저의 죄가 끝이 없는 만큼 천주의 자비도 한이 없으니, 천주의 손길이 저를 인도하여 주신다면 만 번 죽더라도 원통함과 불안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몹시 약한 저는 용감한 결심을 할 수가 없어 때때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내가 죽음을 얻는다면 내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그런데 오늘 천주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시니 이것이 가장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식의 본분을 못다 하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제게는 몹시 마음이 아프고 후회가 되는 일입니다.
이제 영영 이별을 함에 육신의 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겠사오나, 저의 이 길이 어머니께서 받는 영복의 문을 열어 드리게 된다면, 그 또한 영원한 즐거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 모두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동생들이 어머님께 효순하기를 바라며, 또 저의 아들 귀비와 함께 천국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을 잘 보존하였다가 영원히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순교하는 길이 천국의 영생과 복락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모든 가족들이 동참하기를 언제나 기도하였다. 그것이 신앙의 길이며 삶을 영원으로 이끄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 하직 편지를 쓴 이튿날인 1802년 1월 29일(1801년 12월 26일) 가롤로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으미,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목록 쓰기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이용약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10번지 충무빌딩 313호    Tel:02-2269-2930    Fax:02-2269-2932    Email:wonjuse@hanmail.net
COPYRIGHT DOMA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