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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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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순이(1781~1802 루갈다)-1 날짜 2005.04.21 15:11
글쓴이 관리자 조회 447
이순이(일명 유희, 루갈다)는 부친 이윤하와모친 권씨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17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윤하는 지봉(芝峰) 이수강의 8대 후손이며 권일신의 매부이기도 하다.
이윤하가 어떠한 경위로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일찍부터 남인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서학 운동에 관계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정양용 선중씨묘지명]에서 "성호 문하인 이윤하.이승훈.김원성 등은 정위석교(正位石交)하고, 이익의 학을 승수하기 위해 녹암 권철신을 중심으로 강학회를 개최했다"라는 내용이나, 이승훈.이윤하.정씨 삼형제와 권일신 부자를 비롯한 사대부 및 중인들이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 모여 본격적인 설법 교해를 하다가 1785년 봄 추조 관헌들에게 발각되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성물을 압수당하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체포되자 이윤하.권일신 부자.이총억.정섭 등과 더불어 형조로 달려가 압수된 성물들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사실들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윤하의 활동은 누구의 권유라기보다는 가족적 전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까앍은 태종의 첫번째 아들이었던 경령군의 6대손이며, [지봉유설]로 유명한 이수광의 후손인 그가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천주실의]등 천주교 관계 서책들을 전습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게 전습시켰다는 사실을 이윤하의 큰아들인 이경도의 문초 기록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모친 권씨는 권암의 딸이며 한국 교회 창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권철신과 권일신의 누이임을 <벽위편>이 밝혀 주고 있다. 이들 권씨가의 여인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수준 높은 사족가의 여인들로서 교양의 기반위에 서학의 새로운 신앙 생활을 통하여 덕해이나 부덕을 실천하였고, 사회적인 인식이나 안목 또한 높았다.
이와 같은 가족 관계에서 출생하여 자라난 이순이는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인 "가족적 전습"에 의해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고, 전형적인 모전여습(母傳女襲)으로 신앙적인 덕행을 실현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동시에 윤리적인 도덕이나 신덕이 출중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전여습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자인 달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 루갈다는 강직한 성격과 상냥하고 열정적인 마음과 총명을 타고났다. 한마디로 그녀는 육체와 정신의 모든 자질을 타고난 데다가 그 지위에 알맞은 교육으로 그 자질을 쉽게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보다 더 행복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자녀들을 신심 속에서 양육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이 루갈다는 덕이 많은 어머니의 보살핌에 충실히 응하여 그녀의 모든 생각은 자기 영혼의 권에만 집중되었고 그 마음의 모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바쳐졌으며, 그녀의 높은 가문으로 쉽게 마련할 수 있었을 영화와 향락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전여습의 교육을 받은 이순이는 1795년 14세가 되었을 때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오자 몹시 기뻐한 나머지 4일 동안이나 한 방안에서 성체 배령의 준비를 한 후 영성체를 하였다. 처음으로 영성체의 즐거움을 가졌던 그녀는, 이후 평생을 동정으로 보냄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풍습이 이를 허락치 않았으므로 그녀는 남몰래 괴로움에 잠겼다. 그러던 중 때마침 전주 지방에 살던 양반 출신인 교우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의 큰아들 유중철(혹은 종철, 요한)도 자신과 곡 같은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그에게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유항검의 가문보다 훨씬 높은 왕손가였던 이순이의 집안에서 여러 친족들이 반대하였으나 이순이의 모친은 이를 허락하여 1797년 마침내 가족들의 승낙을 얻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 이듬해 9월 이순이는 시가로 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순이와 유중철의 부부 생활은 마치 성 요셉과 성 마리아와의 부부 생활과 같았는데,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히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이순이는 천주교의 덕행을 닦는데 전심하여, 시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겸손하였으며 자비심 있게 모든 본분을 충분히 지켜 나갔다. 감탄할 만큼 온순하고 친절하여 그녀는 그 많은 가족 중 누구와도 조그마한 불화가 결코 없었다. 조선식 표현을 따르자면 이순이는 자기 집뿐 아니라 온 이웃에 향기를 풍겼다 한다. 그의 남편 요한도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과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가지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령이 전국에 내리자 가족이 전부 체포되고 가정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이순이의 시아버지이자 남편 유 요한의 아버지 유항검은 전주 부근의 초남이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양반 계급의 선비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창기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임시 준성직제도가 행해지던 당시 전주 지방의 포교에 주력하면서, 주문모 신부의 전주 왕래도 주선하다가 순교하게 되었다.
즉, 신유년 박해가 일어난 그 해 3월 전라도 대표적인 신자 유항검과 유관검이 체포되었고, 관검이 당신 전라감사 김달순의 회유와 고문으로 교회의 모든 사정과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게 되어 사건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지방의 유력한 신자들이 거의 체포됨과 아울러 국가 안전에 해한 음모로 기소되어 서울로 보내어진 후 의금부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음력 9월 11일 피고인들은 외국인들과 내통하여 사교를 믿고 서양배를 불러들일 음모를 꾸민 역적이라는 최후의 판결이 내려져, 이들 모두는 출신도의 수부 전주로 압송되어 백성들 앞에서 9월 17일 참수와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가족들도 당시의 국법대로 전부 체포되어 처형이 아니면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유항검의 며느리인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군의 관비로 결안이 났다.
이는 당시의 양반가 부녀자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적인 형벌이 되기도 했는데, 더욱이 혼인 생활에까지 동정을 지켜 온 이순이에게는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관장 앞에 나아가 끝까지 항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관장이 들은 체도 아니하므로 결국 유배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서도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는데, 백여리를 겨우 갔다가 다시 잡혀 관비 생활 대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녀는 이 기간 중 자서전적인 옥중 수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수기는 이순이의 오라버니인 이경도의 서간과 남동생 경언의 옥중 수기와 함께 한책으로 묶여져, 이순이의 친모인 권씨 부인과 그들의 가족, 더 나아가 박해의 피난살이로 고생하던 교우들의 손을 거쳐 지금까지 전해져 신심서로서 많은 교우들에게 읽혀졌는데, 이 수기의 내용 속에서 이순이의 뛰어난 신앙심을 함께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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