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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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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필공(崔必恭.토마)1766~1801(1) 날짜 2004.11.19 15:16
글쓴이 관리자 조회 358
최필공(토마)는 서울의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조정에서 의관으로 봉직하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뜻이 굳세고 의로웠으며, 세상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교회에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가난하였고 도움을 주는 이도 없어, 어떠한 관직도 얻지 못하였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의 본 바탕이 솔직하고 너그러웠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이내 입교하였다. 그는 규자동에서 약방을 경영하면서 도저동에서 살았던 김범우에게서 천주교를 배워서, 1790년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는 영세 때에 '토마'라는 본명를 받았다.
입교하는 날부터 그는 크나큰 열성을 보여 영신의 일만 생각하고, 육신의 일은 필요한 것을 돌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 거룩한 열광은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는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때는 한길 가운데 군중 속에 멈추어 서서 "천지의 대왕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하고 외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영세한지 얼마되지 않는, 새로 들어온 신자이기는 하지만 이내 어디에서나 가장 열심한 신자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길거리와 광장에서 신앙을 설교하기를 그치지 않은 용감한 사람, 최필공(토마)의 입교 이야기와 그 종교 생활은 세간에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서 관리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도 일단 체포되어, 형조에 끌려나가 그의 종교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그는 형리들 앞에서 과감하게 "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대답을 한 뒤 그에게 하하여진 형벌도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항상 한결같은 목소리로 같은 신앙 고백을 되풀이하였는데, 어떻게나 순진하고 솔직하며 확신있게 말하였던지 구경꾼들이 모두 감탄할 지경이었다.
왕도 최필공의 그런 진실하고 용감함에 감탄하여 그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 그의 목숨을 살려 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왕은 그를 달래어 몇마디 굴복하는 말을 얻어내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하라고 명령하였다. 간계, 달램, 재산의 약속 등 모든 것이 다 쓰여졌으나 아무 것도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왕의 명령에 따라 최필공의 늙은 아버지와 형이 불려와 눈물과 간청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최필공은 크게 감동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이 그의 마음 속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그는 굴복하지 않고, 무슨 일이 었어도 자기는 참 임금이시요, 참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할 결심은 할 수 없다고 되풀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니, 이제는 법에 따른 준엄한 판결을 선고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심문하던 관리가 동정심이 일어, 시키는 대로 최필공이 순종하였다고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좋은 분별력과 순종을 매우 칭찬하며 곧 그에게 의관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주게 하였다. 또 다른 기회에 왕은, 최필공을 좋은 심지로 돌아오게 한 것을 다시 기뻐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필공이 실제로 두려움에 젖어 배교하는 말을 하였는지, 또는 심약하여 삼람들이 그가 하였다고 거짓 꾸며내는 말들에 즉시 강력하게 항변하지 못했던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풀려난 뒤 자기 죄를 몹시 슬퍼하고, 처음의 열심을 되찾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천주교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을사박해와 신해박해가 전라도의 여러 천주교인의 피를 흘리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재위 중에 조선에 전국적인 공식 박해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정조는 성격이 꽤 온건하여 피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더구나 왕은 남인에 속하는 유명한 몇몇 천주교인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새 종교를 따르는 것을 알고, 사실을 조용하게 몸소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정조가 여러 번 몸소 천주교인들의 심문을 주관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최필공이 기미(1799)년 3월에 당해야 했던 심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후에 순교자 신대보가 그의 편지에서 기록한 것이다.

국왕 : 나도 천주교 서적을 읽어보았다만, 네 생각에는 그 도리를 불교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교우 :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불교와 비교해서는 안 되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천주의 은혜에
의하여서만 생겼사옵고, 보존되는 것도 또 한 가지이며, 다른 은혜, 즉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시며, 우주의 어버이시며 주재자이신 그 천주의 강생 구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옵니다. 아무 뜻도 없고, 원리도 없는 도를 어떻게 감히 이 종교와 비교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참된 결과, 참된 지식이 있나이다.
국왕 : 그러나 네가 만물의 지극히 착하고 위대한 주재자라고 부르는 그이가 어떻게 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더구나 약한 자들에게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단 말이냐. 그것은 믿기가 매우 어렵다.
교우 : 중국 역사를 읽사오면 "성왕 임금께서 당신의 온 백성이 7년 가뭄으로 죽게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사 손톱을 깎으시고 머리를 자르시고, 초석을 두르시고, 유림 빈들로 나가셔서, 우시며 고행을 하시고, 당신을 제물과 희생으로 드렸는데, 그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풍족한 비가 2천 리나 넘는 지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백성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임금님을 성왕이라고 불렀다."하옵니다. 그러하온데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더 크오니까? 예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 사람이나 모든 백성과 세상 만물이 이 구속이 젖어 있사옵고 그것만으로만 보존되나이다. 전하, 그러하오므로 전하께옵서 그것을 믿기 어렵다고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국왕 : 그러나 불교 도한 가볍게 다룰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이름만도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다는 뜻이어서 비길 데 없는 이름이거늘, 어떻게 너는 감히 그것을 경멸하여 말하느냐?
교우 : 그 이름이 아니었던들 그가 무엇으로 자기를 방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이름을 도용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사실은 전하께서 불교라고 부르시는 석가여래는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인간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나 홀로 위대하다"고 말하였사오니, 그것은 가소로운 교만이 아니오니까. 그가 어떤 덕행과 어떤 형덕을 가졌기에 그를 경멸하는 것이 죄악이 되나이까.
국왕 : 진리는 스스로 지탱하는 것이니 매사가 마침내는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 두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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