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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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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필제(崔必悌 베드로)-1769~1801 날짜 2004.12.29 10:48
글쓴이 관리자 조회 458
최필제(베드로)의 입교 과정이나 집안 내력에 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촌형인 최필공(토마스)이 천주교 전파에 열렬했던 신자로서 1801년에 순교한 사실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체포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그 자신이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활약하였음이 분명하다.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지방에서 박해가 계속되고 있을 때, 최필제도 최인길(마티아)등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느느체포된 후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신자로서의 모든 본분을 지켜나가기에 열심이었다. 외교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천주교로부터 그를 떼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집안에서의 모든 시련과 박해를 이겨내면서 성덕을 단련하였다.
나라에서는 여전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고 있었으며 천주교의 반대파들을 기회를 이를 확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마침내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르 시작하게 되자 노론과 벽파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박해령이 내린 며칠 후인 12월 19일 '주의 봉헌 축일'에 최 베드로는 체포되었다. 그는 이날 새벽 몇몇 다른 교우들과 함께 서울의 어떤 길옆에있는 약국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때마침 포졸들이 이 곳을 지나다가 이 교우들이 가슴치는 소리를 듣고 금지된 투전치는 소리로 알고 뛰어들었다. 그리고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을 뒤지니 투전장이 아니라 천주교 축일표가 나왔다. 그러나 포졸들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글을 아는 동료에게 물어 본 다음, 그 내용이 종교에 관한 것임을 알고 다시 범인을 체포하기 위하여 되돌아왔다. 이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고 최 베드로와 오현달(스테파노)만이 그 집에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최필제는 관청에 압송된 후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밝히고 아무런 대답도 아니하였다. 옥에서 그는 사촌인 최필공(토마)과 함께 있었는데, 최 토마는 1801년 4월 8일에 참수를 당하였다.
토마가 참수를 당하자 최 베드로는 그를 장사 지내러 가기 위하여 옥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황서영백서(黃嗣永帛書)]에는 토마의 장례식이 아니라, 임송시에 대세를 받을 수 있었던 외교인 부친의 장례식 때문이었다고 쓰여 있다. 부모들에 대한 그 자녀들의 마지막 의무와 같은 이러한 행위는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땐 매우 중요하고 신성한 일이어서, 민사범으로 갇힌 사람들은 거의 그런 경우에 임시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큰 형사범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며칠 동안 옥에서 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우리 순교자들의 이야기에도 그와 비슷한 예가 여럿 있었다.
최필제가 이 허락을 받았을 때 그 허락을 내려 준 관리는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나 용감한 증거자 최 베드로는 죽음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그리고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네."하고 말하여 순교의 의지를 명백히 표현하였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정한 날짜에 자진하여 돌아와 다시 옥에 갇혔고, 마침내 며칠 후에는 참수를 당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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