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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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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낙민(1750~1801 루까) 날짜 2005.02.15 16:09
글쓴이 관리자 조회 358
홍낙민(루까)은 1751년(영조27년)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을 익혔다. 그가 언제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는지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기록으로 볼 때 그는 조선에서 천주교가 확립되어 갈 무렵에 이미 유력한 교우로서 활동하였음이 확실하다.
1787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열심한 신자들인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승훈(베드로), 정약용 형제 등이 교회의 굳건한 확립을 위하여 교계제도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홍 루까는 신부로 선출되어 성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함을 안 그들은 그것을 즉시 중단하게 되었고, 이에 루까도 평신도의 위치로 돌아가 생활하게 되었다.
교우로서의 활동에 열심이었던 루까는 그러한 일로 인하여 관청에서 지목된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관련하여 체포당하였다. 홍 루까는 신부의 입국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 관청에서는 고문을 가하여 배교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일시적으로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한다는 말을 하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지평이라는 관직에 오르게 되었는데 임무 상 할 수 없이 천주교의 사정에 관한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여전히 나약하고 비겁하였던 그는 모호하게 서학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를 읽고 난 임금은 천주교 신자인 그의 불성실함을 책망하였다. 이에 당황한 그는 서학을 맹렬히 비판하여, 그것이 사람을 금수에 빠뜨리게하고 국가에 화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분명한 말로 배척하였다고 한다.
전국에서는 여전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고 있었으며 천주교의 반대파들은 기회를 노려 이를 확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마침내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되자, 그 이듬해부터 노론과 벽파들은 천주교 탄압을 표면에 내세우고 남인과 시파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홍루까는 매일 묵주신공을 드리며, 공무를 집행하는 중에도 이를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분명 그는 이제 죄를 뉘우치고 예전의 열심했던 상태로 돌아가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낙민(루까)도 천주교 신자로서 박해의 디상자 가운데 들게 되었다. 당시 그가 이조정랑의 벼슬까지 지낸 위치에 있었으므로, 반대파들은 필요한 형식을 갖추고 나서야 체포 영장을 내밀수 있었다.
홍 루까는 의금부로 압송되어 우선 문초부터 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몇해 전에 공공연하게, 또 여러 차례에 걸쳐 천주교를 배반하였으므로 금부에서는 그를 살려주었다. 결국 그는 귀양의 판결을 받았고 관례에 따라 우선 다리에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이 고문을 당하는 동안에 그는 신덕과 통회와 용감한 생각이 마음 속에 되살아나 머리를 들고 관리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은 목숨을 비겁하게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마테오 리치와 다른 선교사들은 우러러볼 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여 지난 날 자신의 배교를 강하게 부인하고는 천주의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려는 뜻을 명백히 밝혔다.
재판을 주재하던 정승들은 이 증거자의 말에 격노하고 경악하였고 모여있던 사람들은 모두 웅성거렸다. 곧 대왕대비 김씨에게 사람을 급히 보내어 방금 일어난 일을 아뢰니, 대왕대비 김씨는 몹시 노하여 루까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몸은 매질로 으스러졌으나, 옥으로 다시 끌려간 그는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씻으며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였다.
결안(結案)에 의하면, 홍 루까는 자신의 이전 배교에 대한 벌로 기꺼이 죽음 당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가 서소문 형장에 가기 위하여 수레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01년 4월 8일이었으며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훗날 1840년(헌종6년) 1월 4일에 순교한 홍재영(쁘로따시오)은 그의 셋째 아들이었으며, 그 해 1월 31일과 2월 1일에 각각 순교한 홍병주(베드로)와 홍영주(바오로)는 그의 손자들이었다. 특히 그의 손자 두 명은 성인의 영광을 얻기에 이르렀으며 이로써 루까의 순교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루까의 신앙 생활과 순교는 그 자신의 신앙심에 대한 증명일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크나큰 힘을 갖도록 하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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