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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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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마리아.신마리아(?~1801)-1 날짜 2005.02.16 12:07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5
조선왕조 후기에 들어오면서 성리학의 영향으로 극단의 공리공론이 발달하고 그 폐쇄성이 정치나 사회에 미친 영향 때문에 조선왕조 초기에 참신하게 적용되었던 문화적인 능력은 퇴색하게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원인 때문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모순과 사회적인 갈들이 쌓여져서 국내외적인 부패와 정치적인 실책이 거듭되었다.
천주교와 이와가(李王家)는 그 전래 시초부터 박해자와 피박해자라는 관계를 가졌지만, 한편 천주교가 전래되었던 그 초기부터 이와가와 천주교 사이에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왕가 사람으로 가장 먼저 천주교와 접촉한 분은 바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간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청국에는 왕실에까지 천주교가 유포되어 있었고 중요한 곳에는 대 성당들이 세워져 있어서, 청에 가는 사신들이 가져온 서책을 통하여 조선사회에 천주교가 수용되었거니와, 소현세자 역시 청나라에 인질로 있는 동안 이미 그 곳에 보편화된 천주교와의 접촉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현세자는 마침 그 곳에 선교사로 와서 봉직하고 있던 아담 샬 신부와 상당한 친교를 맺으며, 본국으로 귀국 할 때는 많은 서양 문물과 서적, 성물 등은 물론 청나라 황제로부터 내려진 천주교 신자인 환관과 궁녀까지 대동하여 귀국했던 것이다. 한편 아담 샬 신부와 서신 연락 내용에는 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고국인 조선에 천주교를 유포시키겠다는 은밀한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그 후 소현세자는 귀국하여 불행히도 3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여러 사가들의 추리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대단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이 있다.
즉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조선 사회에 극도로 생소하고, 그 사회의 근본 정치 이념인 유교 사상과 상반되어 이단시되는 천주교 문물과, 더욱이나 천주교 신자였던 환관과 궁녀들을 대동하고서 조선궁중에 들어왔으므로 조선 궁중에서는 온갖 잡다한 소문과 모함으로 소현세자 일가를 헐뜯었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조정에는 청에 대한 굴욕의 악감정이 만연했던 때로서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아무리 좋은 문물이라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상태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왕위를 계승할 세자의 몸으로 생소한 사학이라고 하는 종교를 들여왔다고 할 때 궁중이나 부중(府中)의 여론이나 그 반응이 어떠했겠나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자는 급기야 부왕인 인조의 미움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에 왕위 계승을 하지 못했음은 물론,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지금까지도 궁중의 비사(秘史)로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소현세자의 죽음이 부왕의 독살이 아닌가 하는 것이 몇몇 사가들의 견해이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면 소현세자는 천주교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천주교의 이왕가와의 관계를 가장 우호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정조의 이복형제였던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의 큰 며느리였던 신씨 부인의 천주교 입교이다. 이 두 부인들은 각각 교명을 '마리아'라고 하는데 강완숙(골롬바)의 전교로 하여 폐궁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입교했으며, 뿐만 아니라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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