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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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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마리아.신마리아(?~1801)-2 날짜 2005.02.17 11:11
글쓴이 관리자 조회 393
또한 구 후에 대원군 자신의 부인 역시 입교하여 영세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은 묵인할 수가 없는 천주교와 조선왕가의 접촉을 드러내며 특히 이와 같은 왕가와의 접촉이 왕족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이제 그와 같은 왕족여성이 어떻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가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1863년 12월 8일 조선왕조 25대 철종이 세도정치의 희생으로 갑자기 서거하니, 철종은 바로 앞서 언급한 은언군 인(絪)의 손자이며 전계군 광(壙)의 셋째아들이다. 은언군은 일찍이 정조 10년에 그의 큰아들이던 상계군이 모반죄로 몰리어 죽게 되자 그의 셋째 아들 전계군과 더불어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따라서 은언군의 부인이던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서울의 구궁(舊宮)인 양제 부안 박씨가 거처하던 궁인 전동(역적의 궁이라 하여 폐궁으로 불렸다)으로 보내졌다.
이때 강완숙은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여 1791년과 1792년 이후부터 접촉하기 시작해서 천주교에 관한 교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들 왕족 부인들과 접촉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생기게 될 불상사를 염려하여 아무도 폐궁의 부인들에게 접근하기를 꺼려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완숙은 그런 것을 겁내지 않고 그 두 왕족 부인을 보러갔으며 뿐만 아니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까지도 그 집에 모시고가서 그들로 하여금 영세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에 몰두하였고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었으며 자주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설교를 들으면서 모든 천주교의 수계 범절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물로 강화도에 귀양간 은언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은언군은 끝까지 천주교인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신유년(1801년)에 사사되었다. 결국 은언군은 정조가 살았을 때 그를 그렇게 죽이기를 꾀하던 무리들 속에서도 정조의 보호로 생명만은 유지하다가 이렇게 정순왕비의 손에 죽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강완숙과 이 왕족 부인들과의 교류는 대단히 친밀하였고, 이 왕족 부인들은 자신의 궁녀들에게도 천주교를 가르쳐서 입교시켰다. 그들은 또 명도회(明道會)의 회원으로도 가입하여 신앙 생활은 물론 비밀리에 사회활동에도 관여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이 체포되자 오갈 데가 없었던 주문모 신부의 최후의 피신소를 이 두 왕족 부인이 제공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두 왕족 부인들은 강완숙과 더불어 당시 조선 천주교회 안에서 중요한 신자로서 활약했고 그들은 함께 모여 주 신부와 미사를 지냈으며 서로 빈번히 왕래하면서 활발한 여신도들의 활동에도 가담하였다.
1801년 신유년 대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 폐궁의 궁녀였고 신자였던 서경의(徐景儀)의 밀고로 이들의 비밀이 폭로되었는데, 그 내용을 대강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은언군의 부인인 송씨와 그 며느리인 신씨 부인이 천주교 서책을 배우기 좋아해서 강완숙이 대단히 경문 해석을 잘 해주었기에, 그 때문에 자주 왕래하면서 두 부인을 가르쳐 주었다. 두 부인 역시 여러 차례 밤에 강완숙의 집에 가서 교리를 배웠으며, 이 때 궁녀인 서경의도 함께 왕래하였는데, 서경의는 이때 자신이 목격한 주문모 신부를 폐궁에 은닉했던 과정을 밀고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후인 4월 28일(음 3월 16일), 이와 같이 주문모 신부의 은닉죄로 인하여 김 대왕대비는 두 부인들에게 사사를 인준하고 다음날 그들은 즉시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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