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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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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희영(李喜英.루까 1756-1801) 날짜 2005.03.02 18:09
글쓴이 관리자 조회 487
이희영 루까는 경기도 여주 온성 사람으로 호는 추찬(秋餐) 이며 그림을 매우 잘 그렸던 화가였다.
그는 41세 되던 1797년 가을에, 노론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건순 요사팟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되었고 1799년에 '루까'라는 세례명으로 주문모 신부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다.
김건순(요사팟)과는 본래 7촌 되는 인척간인 데다가 이희영의 가족은 오랫동안 김건순의 집에서 부쳐 살고 있는 터였다. 김건순 요사팟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오랫동안 교리를 듣고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고향인 여주로 돌아와서 친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그에게서 교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희영을 비롯하여 순교자 이중배(마르티노)와 원경도(요한)가 있었다. 한편 강이천 같은 사람도 함께 교리를 듣고 입교할 의사가 있었지만 끝내 입교는 하지 않았다.
이희영 루까가 입교한 뒤에 김건순, 강이천 등의 주도하에 그들은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즉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은 원한을 씻기 위해 바다의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력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7년 이 계획이 탄로가 나서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이러한 세속적인 계획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대신에 참된 진리를 신봉하라고 권고하였다.
이희영 루까는 입교하기로 결심한 뒤에 즉시 서울로 올라가 주신부를 만나서 자신이 천주교를 믿고 있음을 확실히 밝히고 세속적인 친구들을 멀리하고 앞서 계획하였던 [해도병마] 계획 같은 것을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포기했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이희영 루까는 정광수(발라바), 홍익만(안토니오), 황서영(알렉산델)과 같은 열심한 교우들과 왕래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일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더욱더 깊은 신심 생활과 교회일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여주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가 교회안에서 맡은 일은, 역시 그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화가로서의 뛰어난 재질로 성화나 여러 가지 상본 등을 그리고, 그러한 성화나 상본들을 교우들과 주문모 신부에게 돌리는 일이었다.
그러한 그의 그림 한 폭이 1984년경 뒤늦게 발견되어 한국 천주교회의 미술사 하계의 바상한 관심을 모으로 있다. 이 그림은 이희영 루까의 호인 (秋餐)이란 낙관이 선명한 가로 32cm 세로 1백 5cm의 채색 견본의 [쌍견도]로써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라는 것 이외도 서양화 기법의 한국 전래를 가늠하는 사료적 가치도 높게 평가되는 그림이다.
고목 아래 두 마리의 개가 있는 이 그림은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맹견도]의 화법과도 흡사해 작자 미상인 이 [맹견도] 역시 이희영 루까의 작품이 아닌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까지 평가하고 있을 정도로 화법에 있어서 음, 영 표현이나 구도, 설채법 등이 뛰어나며, 특히 그 당시에 있어서 매우 새로운 서양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맹견도는 당시 북경을 왕래하던 교우들의 서양화의 기법을 익힌 천주교 교우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에는 이희영 루까에 대해 "震案結考"書畵徵" 등의 용어로 서양화의 절묘한 화가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희영은 호가 추찬이며 온성 사람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년에 사학 죄인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다'고 인적 사항을 밝히고 글씨와 그림의 재주가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여 절등했다고 그 기량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위창 오세장은 '이희영이 석찬 정철조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순조원년 신유년 봄에 천주교의 박해(옥사)가 일어나자 글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처형되었으며, 그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서학을 배우고 예수상본 3장을 그려 황사영에게 보낸 것이 탄로되어 자복한 것이며 그 조카 이현(아오스딩)도 서교로 형을 받고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희영 루까는 예수님 그림을 그리다가 순교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는 그가 그린 예수님 그림이 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으며,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은 [견도](승전대학 박물관)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가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 주문모 신부가 전적으로 그를 교회 일에 참석시키고 이희영 역시 온 힘을 다 기울여서 기쁨에 넘쳐 교우들을 도우며 교회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보는 교우들은 그가 언제나 신앙 생활과 신심 솰동을 할 때 즐거움이 얼굴에 넘치고 희망이 가득해서 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즉시 그의 이름이 발각되었으며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였다.
우선 포도청에 감금된 이희영 루까는 거의 한 달 동안 갖은 형벌과 온갖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한다는 말을 하거나 다른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지난 후에 주문모 신부, 김건순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도 의금부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힘든 형벌을 용감하게 참아 받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희영 루까는 포도청, 의금부 등에서 심한 형벌을 굳건하게 참아 받고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다가, 드디어 1801년 5월 11일(음력 3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니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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