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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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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건순(1775~1801 요사팟)-2 날짜 2005.03.21 10:59
글쓴이 관리자 조회 416
즉, 강이천이 김건순 등과 왕래하며, 소위 "해도병마등설(海島兵馬等說)"의 황당무계한 말을 퍼뜨렸다는 김정국의 밀고로 형조에 잡혀 유배되었던 것이다. 요사팟도 강이천과 전에 교제를 하였던 탓으로 관련이 있게 되었다. 다행히 그의 훌륭한 자질과 정직함이 이미 임금에게 알려져 있어서, 임금은 그를 전적으로 존중하고 보호하여 이 사건에 연루하는 것을 막았다.
1799년 6월에 그는 신부에게서 영세를 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의 열심은 훨씬 더하여졌다. 그는 자기가 천주교인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친척과 친구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고하며,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여주 고을과 그 근방에서 많은 외교인들이 신앙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이 컸던 탓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에 불만을 나타내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거기서 멀어지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본분을 충실히 지켜 나갔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사회적 지위로 세속과 조정에 많은 일에 관련된 것에 비해 그가 천주교회의 일을 지도하는 데 큰 몫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정조의 승하로 권력을 잡은 자기 당파가 박해를 준비하고 예고할 때 그가 천주교인들과 약간 소원하였음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정약종(아우구스띠노)과 협력하여 [성교전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천주교의 모든 진리를 순서 있고 체계 있게 설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책을 반정도 저술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요사팟의 행동은 그가 영세한 뒤로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 데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이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의 희생자로 지목당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의 부모 친척과 친구들은 그로부터 심약한 배교의 한 마디를 얻어내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 말을 하지 않았고, 이에 얼마 안 되어 조정의 체포 영장이 그에게 내려졌다. 그리하여 1801년 3월 16일, 포졸들은 그를 잡으러 서울에 있는 그의 생부의 집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는 그때 밥을 먹고 있다가 "내 아들은 오늘 과거를 보러갔네. 그 아이는 이러저러한 나무 밑에 앉아 있을 것이니, 이러저러한 표로 그 애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네. 아무런 의심도 일으키지 말고 자네들 의무를 다하게"라고 의금부 나졸들에게 말하였다. 이 말을 하며 그는 목소리도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요사팟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의 유죄판결을 막기 위하여 권력 있는 그의 집안은 어떤 의미있는 표시를 함으로써 이 양반 죄수가 석방되어 나오도록 모든 것을 조치하였다. 필연적으로 그와 주문모 신부를 대질시키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신부를 모른다고 주장만 한다면 즉시 석방되도록 관원들과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의 끝기를 흔들리게 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집안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온 집안의 명령을 피하지 말도록 하라"고 간청하는 그들을 보았을 때, 요사팟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갈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를 신부 앞으로 데려가,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대답을 주저하였기 때문이다.
주 신부는 그에 대한 유혹을 깨닫고 "아, 그대도 소국의 소이니임을 보이려 하는구먼"하고 말하였다. 조선 양반의 자존심은 이 말로 자극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쇠고랑을 차고 있는 사도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은총이 합함으로써 다시 용기를 내어 자기의 신앙을 과감하게 고백하였다.
심문을 당할 때에 요사팟은 여러 번 천주교를 변호하고, 그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이 나라의 경서에서 뽐은 많은 구절을 인용하였다. 관리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그렇게도 고귀한 집에서 난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가 있느냐? 너는 사도(邪道)를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 경서를 사용하고자 하니, 죽어 마땅하다."
요사팟은 이에 "나는 온 조정과 나라의 대관들이 백성의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임금께 무궁함을 빌어 드리기 위하여 이 종교를 신봉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를 배교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끈기는 변함이 없었으며, 결국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1801년 6월 1일, 그는 서소문 밖에 있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의 고귀함과 덕행과 명성으로 인하여 거기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형장으로 가는 동안 요사팟은 침착과 위엄을 보존하였고 형장에 도착하자 모여 있는 군중에게 "이 세상의 명예와 영광은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요 나도 약간의 명성이 있고 높은 벼슬도 얻을 수 있었으나, 그것이 헛되고 거짓됨을 알고 원치를 않았소. 천주교만이 진리요 그래서 내가 천주교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 모두 그것을 잘 생각하고 내 본을 따르시오"라고 말하고는, 그는 복된 영혼을 보장하여 주는 칼을 받았다.
노론파 안동 김씨 집안의 자손이면서도 천주교를 올바른 진리로 받아들였던 김건순 요사팟은 이렇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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