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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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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권철신(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날짜 2004.07.15 15:36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9
권철신은 조선 건국 공신이며 주자학자인 양촌 권근의 후예로서 대대로 명문으로 내려오는 집안의 5형제 중 장남이며 권일신의 형이다. 그는 남인 대가의 자손이며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으로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유학자였으나 후에 천주교로 개종하여 학덕을 겸비한 선비로서 순교하였다.
1736년 영조 12년에 태어난 권철신의 호는 녹암이다. 그는 경기도 양근 감호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벽의 권유로 입교한 후에는 양근 지방의 사람들을 거의 입교시켜 그 곳을 천주교회의 요람지로 만들었다.
그는 영세하기 훨씬 전인 1777~9년경부터 경기도 광주 앵자산에 있던 주어사 강학회의 주창자였다. 그는 김원성, 이윤하, 이총억,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의 신서파 남인 학자들과 함께 서학 교리 연구회의 주창자로서 주자학과 기타 윤리서,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한문으로 지은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의 철학.수학.종교에 관한 내용을 읽고 비교 연구하였는데, 이때 강학회 사람들은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문과 도덕적 수행을 하다가 이벽의 참가로 본격적으로 천주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강학회에서 조선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천주교 제반 진리 및 교리를 습득하였고 이승훈이 북경에 다녀오자 이벽 선생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녹암 권철신은 자신의 신분적 사회적 명망에 따른 어떠한 결과를 주저하면서도 '암브로시오'라는 본명으로 여세를 하였다. 처음에 그는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했으나 조심성 있고 신중하게 교리의 여러 내용을 연구한 후에 영세를 하였으며, 그 후에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교우들이 형벌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가련한 인간들, 참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그들의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
권철신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사회 관계에서도 너그러움과 헌신적인 행동으로 모든 이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외교인들이 그의 이름을 권위로 복음을 받아들이며 "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직접적인 전교는 하지 않았고 늘 자기 집에서 학문과 종교 생활에 전심하며 그를 시기하고 욕하는 어떤 소문에도 상관치 않고 의연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왕에게 모함하는 것에도 문제삼지 않았다.
179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그의 동생 권일신과 전라도의 여러 유럭한 인사들이 순교하고 천주교회의 유력한 지도급의 손실이 있었을 때, 정씨 집안과 권철신(암브로시오)만이 남게 되자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원망과 미움은 점점 더 심해갔다.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하어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그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1795년 을묘년에 있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사건이 드러나 그 처리 문제가 매우 난처해지므로 대신들이 천주교에 대해 엄중히 다스릴 것을 청하여도 일체의 일들을 담당 관리들에게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1799년 기미년 여름에 대사간 신현조가 녹암 권철신과 선암 정약종의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 하여 왕에게 상소했는데, 왕은 오히려 상소를 올린 신현조의 품계를 박탈하고 서학사건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하였다.
그러나 신해박해 등 여러 박해는 정조의 은밀한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정조가 짐짓 모른 체 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문모 신부 문제를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비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정조가 승하하자, 그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 대와대비 정순와후는 노론 벽파들과 함께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2월 11일 권철신과 정약종, 이승훈 등 남인학파 양반들을 전부 소탕하고자 잡아들였다. 권철신은 정약종, 홍낙민, 이승훈, 홍교만,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지만, 1801년 2월 21일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곤장독으로 66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그분의 유서로는 현재 그의 동학(同學)이고 선배였던 홍유한에 대한 추도문을 비롯하여 홍유한과 교류한 수통의 친필 서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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