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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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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약종(丁若鍾 1760-1801)아우구스띠노-1 날짜 2004.07.19 12:14
글쓴이 관리자 조회 348
정약종 아우구스띠노는 일반 대중을 위한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한 학자로 조선 천주교회 창립기에 최창현(본당 회장)과 함께 명도희의 회장으로 조선교회에 대들보 역할을 한 중심 인물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다.
정약종은 1760년 진주목사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성격이 곧고 명석하였으며 연구심이 남달리 뛰어나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의 형제들을 모두 당대의 석학인 성호 이익의 학통을 받은 저명한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의 동생 다산 정약용은 근대 지향적인 사회 개혁 이념을 담은 방대한 저서를 남긴 실학자로서 오늘날까지도 크게 연구되는 대학자이다.
정약종은 시문(詩文)과 경서(經書)에 능통한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서로 학문을 겨루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오로지 철학과 윤리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젊은 시절 정약종은 가학(家學)으로 이어져 온 성리학에 심취하였고 한편 의학을 깊이 익혀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결국 허무로 귀결됨을 깨닫고 일찍부터 관직으로 진출하기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권철신의 주최로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회가 열리자 19세의 정약종도 이 모임에 참석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1784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 신중한 청년 정약종은 입교를 서두르지 않았다. 좀더 진지하게 교리서를 탐독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그는 1786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았다. 영세 때에 그는 입교에 대한 자신의 망설임이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학자를 영세 주보로 모셨다.
정약종은 입교한 후로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1791년을 전후하여 조상의 제사 문제와 같은 종교 외적인 복잡한 사건이 내포된 전례 문제가 교회내의 논란이 되고 뒤이어 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나라에서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약종은 부친을 비롯하여 많은 친지들이 교회를 떠나기를 강요하였으나 항구한 인내심으로 이를 참아 받으며 신앙인의 본분을 완수하는 치열한 삶의 자세를 보였다.
정약종은 그의 주보이신 아우구스띠노 성인과 같이 세속 사정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철학과 종교 연구를 즐겨하였다. 그는 조그마한 교리 한 가지라도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공부하였고, 그가 통달하지 못한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주면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였으며, 집에서나 밖에서나 교리에 대한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얻은 차원 높은 교리 인식을 바탕으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앙 생활을 보살펴 주었다. 교우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안부 인사를 나눈 후에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무지한 사람에게도 싫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종교의 진리를 가르치고 타일러주었다. 그래서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그의 설명을 들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간혹 냉담자가 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으로부터 대단히 서운해 하였지만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일반 대중을 위한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상하(上下) 두 권으로서 한국인이 처음으로 쓴 기초 신학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주교요지]를 격찬하며 신자용 표준 교리서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주교요지]는 신앙 생활을 바라는 모든 이를 위해서 순한글로 쓰여져 있으며 쉽고 분명하게 해설되어 있어, 부녀자나 어린이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약종 자신은 양반 집권층에 속하는 학자로서 한문에 능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을 위하여 교리서를 한글로 저술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볼 때, 그가 이미 양반 지식증의 특권적 자부심을 초월한 인격을 지닌 인물로 성서에서 깨달은 평등 의식을 사회 공동체의 생활 면에까지 실천한 신앙인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당시의 비판적 지식인에 의해서 형성된 실학적 분위기의 영향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실학자들이 이념의 정립 내지 체계화의 측면에 그친 데 반하여,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에서 체득한 평등사상을 개혁의 필요성과 연결시켜 일상 생활에 적용시킨 행동하는 지식인, 실천하는 신앙인의 차원에까지 도달하였음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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