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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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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약종(丁若鍾 1760-1801)아우구스띠노-2 날짜 2004.07.19 16:54
글쓴이 관리자 조회 339
1800년에 양근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서울로 이사를 한 종약종은 1795년 이후부터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던 주문모 신부를 충실히 보좌하며 자기 집에 모시고 전례 모임을 가졌다. 그는 평신도 교리 연구 및 선교 단체인 '명도회'가 창설되자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800년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박해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세간에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로 널리 알려진 정약종은 자신이 이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친구가 그와 만난 자리에서 그의 옷에서 밝게 빛나는 무수한 십자가를 보게 되어 그 현상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고 하는데, 신자들은 이것이 곧 그가 고통을 받으리라는 전조라고 예측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약종은 집에 모아 두었던 많은 교리 서적 및 성서, 성물, 그리고 주 신부의 편지 등의 교회 관계 서류들을 상자에 넣어 어느 교우집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그 집도 위험하게 되자, 1801년(신유년) 정월에 임대인(도마)이라는 사람을 시켜 상자를 나뭇짐 속에 넣어 다른 교우 집으로 옮기던 중, 밀도살한 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한 기찰 포교의불심 검문에 걸려 관청으로 끌려갔는데 상자를 열어본 결과, 천주교에 관계된 물건이 정약종의 소유임이 드러났다.
1801년 2월 11일 정약종은 그의 고향 마재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오는 도중에 의금부 도사 일행이 옆을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 가는 것이라 추측하고 하인을 보내어 알아본 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잡혀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심문관에게 압수된 상자가 본인의 것임을 자백했으나 주문모 신부에 대한 일에는 침묵을 지켰고, 그의 가족들도 주문모 신부의 일을 고백하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 준다고 회유하였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모두 침묵을 지켰다. 정약종은 천주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신앙이 진실됨을 밝혔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배교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천주교 교리를 법정에서 설명하고 정부의 금압정책이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국왕의 명을 거스르는 불경죄로 단죄되었다. 또 그는 일기장에 써놓은 세상.마귀.육신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대항해 싸워야 하는 세 가지 원수라는 교의상의 표현에 있어 세상은 곧 정부를 지칭하는 것이라 간주되어 반역죄로 단죄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종은 대역무도의 죄인으로 단죄되어 참수형이 선고되었다.
정약종의 최후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모봄과 비슷하였다고 전해진다. 2월 26일 서소문 네거리 형장에 끌려갈 때 정약종의 얼굴은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목이 마르다고 물을 청하는 그를 책망한 호송꾼에게 순종하는 그의 자세는 인간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길에 순종함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사형장에 도착한 후에 형구 아퓨에 않아 그것을 행복한 눈으로 들여다보고는 주위 사람들의 회걔를 위해 기도하였고, 자신이 받을 궁극적인 영광에 대해서 큰소리로 말하면서 권면을 계속하였다. 형리가 말을 중지시키고 머리를 나무토막 위에 대라고 하자, 정약종은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누으면서 "죽을 때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땅을 보는 것보다 좋다"고 하였다. 사형수의 이러한 당당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질린 형리가 손을 떨며 캉르 내리치는 바람에 목이 반밖에 끊어지지 않았다. 이때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 십자성호를 긋고 다시 처음의 자세로 칼을 받음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의 증거자가 되었다.
당시 정약종의 나이는 42세였으며 같은 날에 이승훈,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홍교만 등이 함께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그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가 모셔 광주 마재 선영에 안장하여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정약종이 역적으로 처형되자, 그의 집과 재산은 몰수되었고 남은 가족들은 졸지에 거리로 쫓겨나는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친척들은 자기들에게 어떠한 피해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버림받은 이 가족들을 마재에 데려와 도와주기를 거절하였다. 다만 아우구스띠노의 한 친구가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가족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왔을 때 친척들은 차마 그들을 동네 밖으로 내쫓지는 못하였다. 정약종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가난한 시련의 생활을 하였다. 정약종은 이렇게 될 가족의 불행을 알고서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와 신앙의 모범은 그대로 그의 아내인 순교자 유 세실리아와 큰아들 정철상(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정정혜(엘리사벳)에게 계승되어 실천되었으며, 그의 아내와 막내아들과 딸은 103위 성인 대열에 들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대대로 화려한 수교자의 집안으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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