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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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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가환(李가煥 1742-1801) 날짜 2004.09.09 10:55
글쓴이 관리자 조회 400
이가환은 1742년(영조 18년)에 태어났다. 이용휴의 아들이며,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서 본관은 여흥이다. 호는 금대 혹은 정헌, 자는 정조이다.
이승훈의 숙부인 그는 남인 학자 안정복, 정약전, 이벽, 권철신 등과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친구 관계였다. [황사영 백서)에 의하면, 이가환은 어렸을 적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성장함에 따라 풍채가 우람하고 태도가 당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도량이 크고 문장이 전국에 으뜸이었고,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여 일찍이 그 자신 스스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고 할 만큼 수학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정조가 '진학사'라고 붙일 만큼 대학자였다.
그는 서른 살이 넘어서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선왕이 훌륭한 그릇이라 하여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갑진, 을사년 무렵에 그는 이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나 역시 서양 서적 몇 권을 보았는데(그의 집에 [직방외기], [서학범] 등이 있었다), 그것은 기이한 글, 괴벽한 책으로 다만 내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소. 그것이 어찌 생사의 도리를 깨달아 내세에 마음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겠소?"라고 하며 꾸짖었다. 그러자 이벽이 이론에 의거하여 대답하니, 가환은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가져다 자세히 읽어 보겠다고하였다.
이벽은 초함 책 몇 가지를 주었는데, 그때 [성년광익] 한 권이 있었으나 이가환이 영적을 믿지 않을 것 같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환이 기어코 달라고 하여 이벽이 그때 가지고 있던 성교 서적을 모조리 가지고 가서 정신을 가다듬어 되풀이해 읽어보고는 믿기고 결심했다. 그는 "이것은 진리요 정도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이 책 가운데 한 말은 모두 하늘을 포함한 것이요, 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나 서양 사람이 바다를 건너와 전교하지 못하고 마땅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하고 마침내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화하고 비밀히 이벽등과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상당히 열심이었다.
이때 이승훈 등이 전례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함부로 성사를 행하였는데. 이가환은 남에게 권하여 그를 세례를 받게 하였으나, 자기는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가 사신이 되어 북경에 가서 서양ㅇ 사람에게 영세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해지 않아 형세가 어려워짐을 보고는 마침내 가지고 있던 모든 도서를 없애버렸는데,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 받는 사람은 대부분 가환의 일가 친척들이었으므로 악한 무리들이 항상 그를 교주라 지탄하여 배척하였다.
신해년 박해 때는, 그는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박해에 앞정서 자기를 변명할 계책을 삼기도 하였다. 교우에게 "도둑 다스리는 법" 조문을 적용한 것도 가환에게서 시작된 일이다. 신해년 이후에 선왕이 남인을 많이 등요하자, 가환은 기회를 타 여러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을묘년에 세 사람이 순교한 후에 악한 무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일을 잘 모르고 그 죄를 이승훈과 이가환에게 돌려 잇달아 상소하여 번갈아 공격하였으므로 선왕도 하는 수 없이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보내고 가환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켰다.
충주에는 전부터 남들에게서 비난을 많이 받아오던 한 교우가 있었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리며 배교하라고 명령하였다. 교우에게 주뢰를 사용한 것도 가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또 그는 관기를 첩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것이 다 자기에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다시 등용되지 못하여 집에서 글을 읽으면서 지냈다. 그리고 그의 집을 주문모 신부가 한 달에 한 차례씩 미사 지내는 집으로 허락하였다.
그의 아내는 본래 성교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을 권유하여 감화시켰으며, 혹 성서가 탄로 나도 가환은 조사하거나 처별하지 않았으며 점차 그도 신앙생활에로 깊이 들어갔다.
무오년, 기미년 사이에 그는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그에 대한 자기의 소신을 말하기를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일이라서 치면 칠수록 더욱더 일어나오. 주상께서 아무리 금하려고 하셔도 끝내 어찌하여 못할 것이오"하였다. 정조가 승하하시고 신유년에 대박해가 일어나자 물론 그도 일차로 체포되었다.
그가 처음에 금부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변명하고 죄를 승복하지 아니하였으나, 옥사를 다스리는 자가 모두 평시에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이라 기어코 처벌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 또한 마침내 자신의 믿읍을 고백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변하지 안니하여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 아래 옥사로 순교하였는데, 이때 그이 나이 6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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