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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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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9~1801 날짜 2004.09.17 17:05
글쓴이 관리자 조회 416
최창현은 1759년(영조35년)에 태어났으며, 조선의 왕도이던, 한양의 초전골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중인의 자식으로서 그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업에 종사하였다. 창현이 살던 초전골에 물맛이 좋은 큰 샘이 있었는데, 그는 이 우물이 있는 동리에서 으뜸으로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을 가진 관천을 호로 삼았다.
비록 중인의 신분에 속했으나,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견문을 넓혀 조용한 성품을 지니고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가 천주교 신앙과 가까이 한 것은 이벽, 정약종 등과 접촉하면서부터이다. 이들과 더불어 천학을 연구하다가 천주교에 뜻을 품게 되었고, 이벽의 인도로 마침내 천주교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중인 신분이었고, 그의 집안이 약국이었기에, 양반.상민을 막론하고 널리 교제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여 년동안 하루같이 하였고,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다시 몇 마디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으며, 도리의 강론은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하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아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령스러운 마음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망 높은 지도적 영향력과 열렬한 신안심은 일찍부터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 천주 사업에 공헌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가을에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교단 조직이 이루어졌으나, 그 교회는 단 한 사람의 성직자도 없고, 미사 성제조차 거행하지 못하는 목자 없는 교회였다. 자발적인 수용에 의해 얻은 열렬한 천주 신앙의 실천이었으나, 신품성사에 대한 교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초기 한국 교인들은 신앙 생활의 체계적 정비를 도모하여 임시 준성직자단을 이루었다. 이 때에 최창현도 그의 신앙심과 탁월한 전교 능력이 높임 평가되어 신부로 선임되었다. 그느느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서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황사영이 그의 백서에서 증언하고 있다.
임시 준성직자단이 교회법상 잘못된 것임을 북경 주교로부터 연락 받고, 그 조직을 해체한 후 한국 천주교회가 전개한 성직자 영임 운동은 1794년초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주 신부 입국 후에 최창현은 최인길(마지아:1795년 을묘 북악산 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교ㅏㄴ 전교회장)과 더불어 주문모 신부의 활동을 충직하게 도와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신앙열과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여 교인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는 비록 중인의 몸이었으나, 양반 교인까지도 그를 지도자로 받들게 되니,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등의 가르침은 그를 중심으로 뻗어나가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조용하고 슬기로웠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이라고 달레의 [한국교회사]에도 적혀있는 최창현은 항상 간결한 어조로 자세하게 진리를 설명하였고, 그의 말은 "꾸밈이 없으나 모든 이가 그의 말을 만족스럽게 들어 그들의 영혼에 큰 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겸손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천성과 같아, 당시 교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을 바치던 총회장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그는 책을 베끼는 일에 능란하여, 많은 교리서를 열심히 베껴서, 교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천주의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고, [주일과 축일의 성경의 뜻]이라는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성서에 대한 열심을 심어 주려 하였다.
20년을 두고 하루같이 천주님 뜻대로 살고, 자기의 신앙을 남에게 나누어주기에 온 정성을 다해 온 총회장 최창현은, 1801년(순조1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당국의 중요한 수색 대상 인물로 지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의 한 사람이미은 배교자 조화진에 의하여 박해 당국에 알려져 있었다. 1801년 초부터 전국적으로 박해의 소동이 벌어지자, 최창현은 한 때 그의 집을 떠나 피신하였으나, 발병하여 남의 집에 그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신병 치료에 힘쓰고 있었다.
이 때에 배교자의 안내로 들이닥친 ㅍ졸들에 의해 체포된 그는, 포도청에 수감되고 갖은 악형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후려치는 곤장 밑에서 혼절하여 죽은 것같이 보이던 사람이 매질이 끝나고 형리가 그의 죄목을 열거하자, 벌떡 일어나서 형리들을 상대로 십계명을 강의하였다 한다.
1801년 신유년의 최창현 추안에는 최초의 교단 조직의 모습을 설명하였는데, 그느느 "천주의 첨례날에 비단 장막을 치고 천주상을 모셔놓고 천주의 은혜를 생각했다."고 공술하고 있다.
혹독한 매질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천주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신앙이 평소에 철석과 같이 굳게 다져진 것이었기에 이런 감격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총회장답게, 지도적 교인답게, 천주의 신앙을 아수라와 같은 형리들 앞에서 증언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최창현이 순교한 것은 1801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낙민 등 초기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같이 서소문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에 그의 나이 43세였다. 이벽과 더불어 가장 많은 사람에게 천주 신앙을 알려주었으며, 천주를 향한 뜨거운 믿음으로 죽음에 앞서 호교의 글을 써 천주교의 옳음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고, 기꺼운 마음으로 희광이가 내려치는 칼날 아래 목을 내놓고 순교하여 천국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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