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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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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 곤자가)-1759-1801 날짜 2004.10.04 11:27
글쓴이 관리자 조회 464
한국 교회사에서 '내포의 사도'로 흔히 불리는 이존창은 1759년(영조 35년)에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종리의 여사울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단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그의 집안은 부농으로서 넉넉한 살림을 하던 양반이었다. 그래서 비록 지방 양반신분이었지만, 그는 집안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도 면학에 대한 그의 소망은 간절하였다.
그는 마침내 고향 땅에 자기를 가르쳐 줄 스승이 없다고 느끼고 상경하여, 유명한 학자를 찾아 나섰다. 그가 스스로 모시게 된 분이 영조 말년에 서울에서 학명을 날리던, 권철신과 권일신 두 형제였다. 서울 교회였던 명례동의 김범우 집에서 권일신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벽, 이승훈과 더불어 한국 교회를 창설하고, 성직자 없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로서, 많은 사람을 천주 신앙으로 이끌어 준 권일신의 인도로 그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루도비꼬.곤자가(누수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본명)의 본명을 받았다.
그는 그가 얻은 천주의 신앙을 혈족 그리고 같은 고향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고향 여사울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의 가족과 주변 친구들을 천주 신앙으로 인도하여, 얼마 가지 않아 3백여 명의 신자를 얻어 내포 교회를 이루었다. 그가 이끄는 내포 교회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이 창설한, 서울 교회에 이어 조선에서 두 번째로 생겨난 신자 공동체였다. 그는 주로 내포 지방의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농민과 빈민 등 서민층 전교에 힘써 서울의 교회와 달리, 지방인 중심의 지방 교회로의 자리를 굳혀 나갔다.
성직자 없이 창설된 한국 교회가 성직자를 모셔야겠다는 일념에서 신품 성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자율적으로 임시 준성작자단을 편성하게 되었을 때, 이존창도 신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내포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 후 북경 주교로부터 연락받은 후 신부로서의 성무 집행은 즉시 중지하였으나, 평신도 지도자로서 그의 전교 활동은 전과 다름없이 열성적이었다.
그의 놀라운 전교 활동에 대하여 달레의 [한국교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여,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 왔다. 그의 전교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의 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안이 이제는 선비의 집안뿐만 아니라, 농부.노동자.서민.빈민들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하여 멀리서 떼를 지어 왔고, 종종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신자들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의 결과로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미, 서산, 덕산, 태안 등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에 천주교 신앙이 뿌려져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이러한 활동은 박해 당국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신해년(1791년) 진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각지에서 천주교 박해가 벌어지게 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공주로 이송되어 충청 감영에서 철저하게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고, 생각은 착잡하게 엇갈렸다. 쇠약해지는 몸과 가물거리는 정신 가운데, 한때나마 신앙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오자 맹렬한 기세로 전교 활동을 폈다. 이때에 그에게 마음의 아픔을 주게 된 것은 그의 형이 이존창의 전교 활동을 반대하는 일이었다. 그는 동생의 일로 자기 집안에 앙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이존창의 전교 활동을 방해하고 나셨던 것이다. 한편 이존창 자신도 너무나 두드러지는 인물로 내포 지방에 알려졌기에, 보다 새로운 지방에 가서 천주 신앙을 심어주기를 결심하고, 1791년 말에 홍산 고을로 이사하였고, 후에 다시 금산으로 활동의 터를 잡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한국 교회의 사목을 위하여 조선 땅으로 숨어 들어오자, 이존창은 곧 서울로 올라가 신부를 찾아뵙고, 충직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도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공주 감영에 갇혔을 때 일시적이나마 천주를 멀리했던 일을 안타까이 생각하여, 순교적 신앙으로 보속하여야 할 것임을 자주 당부하였고, 존찬은 이 격려와 권면에 힘입어 순교의 날이 올 때에는 동요없이 주를 위해 기꺼이 피의 제사를 지내 순교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존창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이 직접 모시고 고산으로 거처를 옮겨 천주 사업에 헌신하고자 생각한 바도 있었으나, 주 신부가 서울 계산동의 최인길(본명 마지아, 역관이며 주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를 돌보다 1795년의 '을묘 북악산사건'으로 주 신부를 피하게 하고 대신 잡혀가 순교하였음) 집에 머물며, 서울 교회를 돌보아야 하기에 다시 홍산으로 내려가 내포 교회를 이끌었다.
1795년 배교자의 밀고로 최인길의 집을 급습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고자 하였던 박해 당국이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거나, 입국 후에 접촉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내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을묘 북악산사건') 이존창의 접촉 사실도 드러나 충청 감영으로 체포 연행되었고, 취조 받은 후 천안으로 이송되어 연금 생활을 겪게 되었다.
잡일을 강요당하며,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했던 6년간의 연금 생활은 그에게 큰 시련이었으나,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으로 주를 향한 생활을 나날이 이어갔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국왕 순조가 즉위하자, 벽의 새로운 집권 세력에 의해 다음해 초부터 왕명에 의한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인 신유박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01년 3월 22일에 이존창은 다시금 공주로 압송되었으나, 서울에서 체포된 한국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과의 대질 취조를 위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국청에서 거듭 심문을 당하였다. 평소 순교의 열의를 품고 있던 이존창은 두 번째의 추국의 마당에서 스스로 호중(충청도 지방)의 천주교 신자의 지도자임을 시인하고, 30대나 내려치는 곤장을 맞고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초대 교회의 지도자인 최창현.정약종 등과 같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존창은 다른 사람과 달리 그가 오랫동안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써 온 충청도 땅에 내려보내, 감영 소재지인 공주에서 참수 치명케 되었다. 이는 내포 교회의 여러 신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전주신앙이 곧 죽음을 부르는 것이라는 위협과 시위의 경종을 노린 것이었으나, 이존창 자신에게는 그 자신이 씨 뿌려 가꾸어 놓은 내포 교회 지역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순교로 믿음을 보여 줄 수 있기에 무엇보다도 기쁨이 되었다.
이존창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승훈, 최창현, 정약종보다 이틀후인 4월 10일에 참수치명되었다. 그가 참수될 때 여섯 번째에 가서야 내려치는 칼날 아래 목이 끊기었다 한다. 그러나 수일 후 친지와 동지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목과 몸은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다만 희끄무레한 실날같은 흉터만이 칼자국을 나타내는 정도여서 보는 이를 놀라게하였다 한다.
뒷날 숱한 순교자를 배출한 내포 교회는 바로 이존창에 의해 창립된 것이어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한다. 또한 뒷날 박해시대에 배출된 두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 조상들 모두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게 된 것이니, 이들이 불과 15~16세의 젊은 나이로 감히 이국 땅으로 수할할 것을 자원하고 나섰던 것도 바로 이존창이 뿌려 놓은 씨가 풍성한 열매를 거둬들인 가장 뜻 있는 일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시 일각 황세 바위는 바로 이존창을 위시한 몇몇 교인들의 순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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