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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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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1775~1801 - (1) 날짜 2004.10.06 12:41
글쓴이 관리자 조회 413
황사영은 1775년(영조51년) 남인 집안의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필 속에 자랐다. 창원이 본관인 황사영의 집안은 10대가 벼슬을 지낸 당당한 양반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도 진사시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지낼 만큼 학문이 높았다. 그러나 불행히고 황사영이 태어나기 전에 작고하였다. 학문하는 집안의 자손답게 황사영은 영특하고, 모든 친구들보다 뛰어난 재간이 있었다. 학문에 힘쓴 보람이 있어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그의 영특함이 마침내 정조에까지 알려져 어전에 불리어 격려를 받았으며, 따뜻하게 어루만짐을 받는 성은을 입었다. 이 특은을 입은 후로 황사영은 당시의 관습대로 국왕의 손이 닿았던 손을 비단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재간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때에 관례를 치르고 '덕소'라는 자를 쓰게 되었다.
황사영이 천주 신앙과 맺어지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1790년 마재(오늘날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한 부락)에 사는 명문가 정씨 가문에서 부인을 맞았다. 그의 부인 정명련(혹은 난주, 마리아)은 정약현의 따님이었으며, 약현은 천학서를 연구하여 선교 신부들의 가르침없이 천주 신앙을 얻어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중심 인물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맏형이었다. 이로부터 마재와 서울의 정씨 집안을 드나들며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를 접하였고, 처숙들로부터 천주 교리를 익히게 되어 마침내 천주교에 입교하여, 알렉산델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일단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로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대과에 나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를 봉행하는 생활에 몰두하였다. 이때에 황사영은 "천주학을 시작한 다음 해에 나라에서 금령을 강화하니, 친척들과 친구들이 천주교를 물리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해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입교한 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교우 집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리 서적을 필사하여 신앙 지식을 더하였고, 서적을 나누어주기에 힘썼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성직자로 영입되어 서울에 도착하여 계동 최인길(마지아)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사목 활동을 개시하자, 황사영은 주 신부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에 최창현과는 사우(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친구),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과는 혈당(생명으로 행동을 같이 하는 무리)으로서 맺음을 다하였다. 비록 그는 20여 세에 지나지 않는 젊은 몸이었으나, 그의 학식과 신앙의 뛰어남으로 한국 교회의 큰 재목으로 촉망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그를 신임하였으며, 그도 주문모 신부를 가까이 모셔 한시도 떠나기를 원치 않았으나, 주 신부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1년에 불과 서너 차례 정도 밖에 만나 뵙지 못함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자기 집으로 주 신부를 모셔 미사성제를 드리고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 초부터 신유박해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검거되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한국 교회가 겪게 된 최초의 국가적 규모의 전국적인 박해였다. 전국을 휩쓰는 검거 선풍 가운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황사영의 이른바 사우, 혈당 등 한국 교회의 지도적 교우들이 모두 순교하게 되었으며, 한국 교회가 모시고 있던 오직 한 분의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도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의 씨를 말리고자 달려든 박해 당국자의 광란 속에 한국 교회는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표적 신자로서 교우 사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황사영이었기에, 그에게도 박해 당국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박해의 추이를 보기 위해 일단 집을 벗어나 계동 어느 군사의 집과 삼청동 산 속에서 수일을 지내다가 동대문 밖 송재기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환난 중에서도 침착하게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전후 대책을 취해 오던 황사영은, 김한빈(베드로)과 같이 서울을 벗어나 깊은 두메골 교우촌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양반 상제를 가장하고 상복을 입고 피신의 길을 재촉하여 예천 땅을 거쳐 제천의 깊숙한 산골 마을인 배론(오늘날의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한 마을)으로 찾아가 교우 김기동의 옹기가마 토굴 속에 은신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휴양차 내려온 '이상주'라 일컬으며 숨어있으면서도 교우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김한빈을 서울로 올려 보내 서울에서의 박해와 교회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조선 교회가 모시고 있던 단 한분의 성직자를 새남터에서 잃고, 지도적 교우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며 많은 교우들의 참상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의 가슴은 메어지듯이 아팠다. 똫ㄴ 풍지박산에 가까운 상태의 위기에 몰린 조선 교회를 생각하고 비탄에 젖었다.
이러한 아픔과 비탄 속에서 그는 북경 교회에 한국 교회의 고난을 알리고 원조를 받아 교회를 다시 소생시키고, 천주의 신앙을 편안하게 같이 나눌 수 있는 복지를 이루어야겠다는 사명 의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어두 컴컴하고 불편한 토굴 속에서 이러한 그의 구상을 담은 편지를 작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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