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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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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1775~1801 - (2) 날짜 2004.10.07 18:20
글쓴이 관리자 조회 343
그는 이 편지가 반드시 북경.주교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밀사가 옷 속에 꿰매어 감출 수 있도록 하늘하늘한 명주천에다 쌀알 만한 잔글씨로 썼다. 1백 21행 1만 3천 자에 이르는 장문의 황사영의 백서는 종이에 쓰이지 않았기에 주목을 끄는 것이 아니라, 황사영의 간절한 소망과 세계적 경륜, 그리고 뜨거운 신앙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에 종교적으로 가치있는 편지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그가 기도하듯이, 피를 토하듯이, 정성과 열정을 다하여 작성한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올리는 서한이었다. 작성자는 황사영이나, 백서에는 '다묵'이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다묵은 그의 동지의 한 사람인 황심(도마)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황심이 그간 몇 차례에 걸쳐 주문모 신부의 밀사로 북경 교회에 내왕하였고 북경에서 영세한 사람이기에 북경 교회 성직자들과 안면이 있어서 백서의 신빙성을 더하고 북경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백서의 문장은 당당하고 정성스러웠다. 그는 먼저 이 서한을 올리게 된 사정을 말하고 금번의 박해로 말미암아 겪게 된 한국 교회의 고난의 상화을 순교자의 열전 형식으로 기술하면서 적었는데, 그 순교자적 기록의 태도는 매우 엄정하다. 순교자 개인별로 그가 직접 견문하거나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만을 상세하게 북경 주교에게 보고하고 있다.
또한, 주문모 신부의 자수의 사정과 순교의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참상을 기록하고 난 후에 차분하게 한국 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첫째는 북경 교회와 한국 교회의 비밀 연락을 위한 제안이고, 둘째는 한국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기했으며, 셋째로 한국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 세 가지를 제시했다.
즉, 교황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책, 청나라 정치권에 의한 개입의 방책과 서양 군사력 동원에 의한 방책을 건의하였다. 외세의 침략을 자극할 위험성이 있는 문제이나, 그것은 오로지 신앙 자유 구현을 위한 일념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대외 봉쇄 쇄국 사회에서 자라난 한 교우학자의 세계적 경륜과 신앙 열의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 백서는 황사영이 배론에 은거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배론으로 찾아온 황심이 부연사행의 말몰이꾼으로 자주 북경에 내왕하는 교우 옥천희와 연락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밀송하기로 합의하였다. 옥천희는 주문모 신부와 황심의 주선으로 북경교회를 거듭 방문한 일이 있는 교우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요한 시기에 옥천희가 1801년 말에 북경의 사행을 따라 들어가는 도중에 1801년 초가을 국경에서 체포되어, 황사영의 웅대하고도 착실한 교회 부흥책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황사영, 화심 등의 순교를 초래하게 되었다.
체포된 옥천희가 황심과의 관계를 실토하여 황심이 양력 11월 1일에 서울에서 검거당했다. 황심은 포도청에서 취조받는 가운데 박해 당국이 도피한 황사영 체포에 혈안이 되어 전국을 수색하며 그로 인한 교우들의 희생이 너무나 큰 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고 박해를 끝내기 위해 마침내 동지인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이리하여 포졸들이 배론을 급습하여, 황사영을 검거케 되었다.
그가 체포되면서 그의 심혈의 희망이 담겨있던 백서가 당국에 압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황사영을 곁에서 도와주던 김한빈도 같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양력 11월 5일)
황사영은 평소 자기 주변 교우들에게 일이 극단에 이르면 자기를 밀고하라는 말을 해 왔던 터인지라, 포졸이 은신처로 몰려와 그를 체포할 때 놀라거나 동요치 않았다. 다만 나랏님이 잡아주셨던 손목을 비단으로 감고다녔는데 포졸들에게 이 손목만을 만지지 말라고 타일렀고 포졸들 역시 상감의 손길이 닿았던 그 손목은 잡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압송된 황사영은 황심, 김한빈, 옥천희 등 동지들과 같이 국청에서 어느 교우들보다 혹독하게 국문을 받았다. 그러나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사영이 주모자이었기에, 가장 큰 고통을 당했으나 신앙을 배반할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꿋꿋이 신앙을 지키다가, 양력 12월 10일에 한국 순교자들의 순교 성지인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황심(도마), 김한빈(베드로), 옥천희(요한)와 또 다른 교우인 현계흠이 휘광을 내려치는 칼날 아래 참수 치명하여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27세의 청년 지도자이던 황사영은 백서 작성자였기에, 다른 순교자와 달리 반역자로써 새남터에 능지처참육시의 형을 받았다. 이로써 황사영은 순교하였거니와 그의 가산은 몰수되고, 노모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노비가 되었고 아들 황경한은 나이가 어려 사형은 면했으나 추자도로 보내져 역시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실로 천주에 대한 신앙에 모든 것을 다 바쳤다 할 것이다.
황사영의 신앙과 경륜이 담겨져 있는 백서는 관가에 압수되었으나 그때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894년에 오묘한 안배에 의하여 우연히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뗄 주교(한국 이름 : 민덕효 주교)에 입수되어 교회의 품안에 들어왔다. 오늘날 이 한국인의 순교적 신앙의 증거물인 백서는 1925년 79위 한국 순교자의 복자 시복에 즈음하여 로마 교황에게 헌상되었기에 교황청 국무성 고문서관에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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