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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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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1~1801)-(1) 날짜 2004.10.11 15:23
글쓴이 관리자 조회 366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사의 은총을 받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는 임시 준성직제도의 자치 교회를 설립하였다.
초창기에 갓 영세한 신도들이 교리 지식의 부족으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교계 체제를 모방하여 10여 명의 지도급 신자들이 신부가 되어 미사 성제를 봉헌하고 죄의 고백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이르러 일부 신자들이 여러 가지 교회 서적들을 정독한 후에 비로소 이러한 성직 수행이 교회법에 어긋난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즉시 성사 집전을 중단하고 이에 대한 가부를 문의하기 위하여 북경 교구의 알렉산델 드 구베아(1808년 사망) 주교에게 윤유일(바오로)라는 신자를 말파하였다. 북경 주교는 다시 이밀사를 통해서 그의 친서를 보내면서 조선 왕조의 신생 교회의 존재에 기쁨을 나타냈으나, 교계 제도의 설정과 평신도의 성무 집행을 금지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와 제도를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진산사건으로 일어난 신해 대박해로 교회 내 지도층의 변화를 가져왔다. 양반층의 지도자들이 사망하거나 순교 또는 배교하여 교회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지도층으로 중인계급이 등장하였다. 이때 교회의 지도자로 새로이 등장한 이들이 바로 최창현(요한), 최인길(마지아), 지황(시바), 강완숙(골롬바) 등이었다.
이제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갈망하던 조선 교회의 신도들은 구베아 주교에게 다시 1790년 밀사를 보내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북경 주교는 이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1791년 2월 마카오 교구 소속 레메디오스라는 포르투갈 이름을 갖고 있던 중국인 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부와 조선 교회의 연락 교우가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지 못하여 첫 선교사의 입국은 실패하였다.
그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아, 3년 동안 북경 교회와 접촉이 없었다. 1793년에 들어서면서 박해의 기운이 가라앉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경에 밀파된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난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를 보내기로 결심하고, 조선인과 비슷한 얼굴 모습을 갖춘 42세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선정하였다.
'벨로조'라는 포루투갈식 이름을 갖고 있는 주문모 신부는 1751년 중국(당시에는 청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며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일찍이 서구 학문에 흥미를 느끼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후에 그는 북경으로 올라가 북경 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으로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신앙심이 깊고 중국 문화와 교회 신학에도 능통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교구장으로부터 성무 집행을 위한 특권을 위임받고,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20일 동안의 도보 여행 끝에 약속된 장소에서 조선 교회의 연락 교우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압정책으로 국경 감시가 삼엄하므로 관문을 통과할 수 없어, 청국과 조선을 갈라놓은 압록강이 얼어야 월경, 잠입할 수 있기 때문에 강물이 얼게 되는 12월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주문모 신부는 약속된 날을 기다리면서 10개월 동안 구베아 주교의 지시대로 만주에서 교회를 순회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에 국경 지대로 와서 연락 교우들을 만나 복장과 머리 모습을 조선식으로 바꾸고 감시를 피하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23일 밤에 입국하여, 다음해 1월에 한양(지금의 서울)에 입성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도착은 신자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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