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회원가입  |  로그인  |  사이트맵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일반자료실
일반자료실
제목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1~1801)-(2) 날짜 2004.10.15 15:15
글쓴이 관리자 조회 446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이 마련한 한양 북촌(지금의 계동)의 교우집(최인길 마지아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우선 성무를 빨리 수행하기 위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795년 성주간에는 세례와 보례를 집전하면서 한자를 통한 필문(筆文)으로 신자들으 죄고백도 들었다.
마침내 부활 대축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이 나라 신도들을 위한 최초의 미사 성제가 감격스럽게 봉헌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착한 목자로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신자들을 만나 영적 위로를 베풀었다.
그러나 사목 생활 6개월만에 주문모 신부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그것은 한영익이라는 신입교우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처를 조정에 밀고하여 6월 27일에 외국인 신부의 체포령이 포도대장에게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일부 신자들이 이 배교자의 거동을 수상히 여겨 살핀 결과, 그의 고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여신도 회장인 강완숙(골롬바)의 집 나무광(후에는 안채에 붙은 사랑)에 피신하였다.
집주인 강완숙은 양반 집안의 출신으로 그녀의 신앙 때문에 시골집의 남편을 떠나 시어머니와 자녀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사회 풍습에 따르면, 양반집은 관헌의 사찰과 가택 수색을 받을 수 없었고, 더욱이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부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한 관습을 이용하여 주문모 신부는 이 집을 그의 사목 활동의 본부로 정하고, 이제는 비밀리에 성무를 수행하면서 그가 순교하기까지 6년 동안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언어 소통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고, 조선 풍속에도 충분히 익숙해져서 지방을 조심스럽게 순회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그러나 발각의 위험 때문에 그의 가정 방문과 사목 활동은 비밀에 싸인 채 극히 제한되어 있어 열심한 신자들이 신부를 찾아뵙고 성사를 받지 못하여 서운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한된 활동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는 그가 입국한 이후로 6천여명의 신자를 증가시켰고,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었다. 그 중에는 왕족도 끼어 있었다. 1786년에 역모죄로 그의 남편들이 사형 또는 귀향에 처하여진 두 부인들은 폐궁이 된 그들의 거처인 양재궁에 신부를 모셔 성사를 보면서 영적 위로를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사목 활동 수행에 있어서 조선 교회의 신자들에게 끊임 없는 열성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놀라운 덕행을 보여 주었다. 당대의 신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문모 신부는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지경이었다. 밤에는 성직을 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거나 책을 새로 쓰거나 하였다. 그는 금식과 극기를 행하고, 자기 본분에 온전히 헌신하였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덕행의 광채를 기적으로 더 빛나게 하고자 하신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믿을 만한 전설에 의하면 한 번은 그가 한양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에 창골에서 화재가 났었다고 한다. 불이 24시간 계속되었는데 그 때에 주문모 신부는 그 무서운 피해를 딱하게 여겨 자신은 그 현장에 갈 수 없으므로, 송 필립보의 젊은 아들을 보내어 불길에 성수를 뿌리라고 명령하였다. 젊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안에 주문모 신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거의 즉시 바람의 방향이 바귀어 폐허밖에 남지 않은 쪽으로 불길이 몰아쳤다.
그리고 신부는 특히 신자들의 교육과 신앙 향상에 유의하였다. 그는 직접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명도회라는 교리 강습 및 연구, 그리고 전파를 목적으로 한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자신들이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신앙의 진리를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는 데에 서로 격려하고 협조하였다. 황사영의 진술에 의하면 이런 모임이 여섯 곳에서 열렸다 하여 육회(六會)라고 불렸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의 정부 당국으로부터 천주교의 자유를 얻고 안전한 선교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불경교회와 연락을 계속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포르투갈 와에게 대선박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 조선 왕국과 포르투갈이 국교를 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주 신부는 이 편지를 북경 교회에 전달할 사람으로 신자들이 천거한 황심(토마스)을 택하였다. 이 밀사는 옥천희(요한)와 함께 1797년 조선 왕국의 동지사행에 끼여 북경 주교를 방문하여 편지를 전하였다.
북경 주교는 주문모 신부와 조선 교회 신자들의 건의에 대해서 "내가 마땅히 우리나라(포르투갈) 왕에게 보고하겠으나 배를 청하여 오게 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우리나라에서 만일 조선 왕국에 금교령이 있는 줄을 알게 된다면 국가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믿지 마십시오."라고 답변하였다.
또한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의 악습을 엄하게, 그러나 지혜롭게 꾸짖어 개선된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의 신심생활을 위해서 [사순절과 부활 시기를 위한 안내서]라는 저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자들이 고백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갖추어야 할 마음의 준비에 대하여 설명한 신심서로서 후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또 다시 배교자의 밀고의 대상이 되었다. 김여삼이라는 냉담 교우가 신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미움과 개인적 물욕 때문에,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포도청에 가서 고발하였다. 이때에 밀고자는 관리에게 봉급이 많은 관직을 보장받고, 신부의 처소에 안내해 줄 날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김여삼은 여행 중에 병이 들어 귀가하지 못해 관리를 만나지 못하여 주문모 신부의 체포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하게도 주문모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어느 신자를 통해 보고받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목록 쓰기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이용약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10번지 충무빌딩 313호    Tel:02-2269-2930    Fax:02-2269-2932    Email:wonjuse@hanmail.net
COPYRIGHT DOMA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