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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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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1~1801 - (1) 날짜 2004.10.21 10:55
글쓴이 관리자 조회 426
강완숙(골롬바)는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여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국내의 사료에서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외의 사료(파리 외방전교회에 소장된 한국측 자료)들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영.정조(1761~1801) 때의 여인으로써 교회 내에서의 활동은 남성들을 능가하였으며, 그 시기에 끼친 영향과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이는 그녀에 대한 선교사들의 찬사와 함께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강완숙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위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여성사안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 시기 대부분의 여성들은 가정에서만 생활하였고,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 시대에 있어서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혔던 것이다.
그녀의 최초의 활동 무대가 교회 안이라는 정해진 곳이기는 하지만, 여성 단체를 조직하였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정녀들이나 과부들을 모아 교육 활동까지 지도하였다. 그리고 명도회의 여회장직도 맡았다. 이는 당시 유교 일색인 양반 사회에서는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강완숙은 내포(內浦) 지방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있었으며 용감하였다. 그리고 생각과 취미가 고상하여 한때 수도자가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덕행을 실천하기 위하여 한때는 불교에 귀의하기도 하였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법공(法供)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
그녀는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는데, 남편이 용렬한 까닭으로 그와 마음이 맞지 않아 항상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면서 속세를 떠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마침 충청도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천주교'라는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책을 구하여 읽어보고 마음을 기울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매사에 열성적이었고 자제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먼저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을 교화시키면서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전교하였다. 한편, 그녀는 남편에게도 온 힘을 다하여 신앙을 갖게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신해년(1791년) 박해 때 고향이 소란해지자 그녀는 남편 전처의 한 아들과 시어머니를 데리고 상경하였다. 그 당시 그녀는 이미 남편에게 쫓겨나 있었다. 남편 홍지영은 열렬한 신자인 아내 때문에 자기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 등이 주문모 신부를 영접하는 행사에 참여하여 경제적인 일을 담당하였으며, 교회내의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일을 도왔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주 신부는 그녀의 영리함과 성실함을 인정하여 여회장으로 임명하고 여신도들을 돌보게 하였다.
1794년 5월 박해 때, 그녀는 주문모 신부를 단독으로 자기의 본가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보호하였다. 포졸들이 문 앞까지 왔지만 안으로 감히 들어홀 수 없도록 만드는 등,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박해가 지난 후, 주 신부는 그녀의 집으로 아주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그 후 6년 동안 자신의 집에 주 신부를 모시고 교회의 모든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였으며, 그의 신임을 받았다. 강완숙은 물심양면으로 주 신부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교회 내의 경영과 적응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또한 그녀는 동정녀들과 과부들을 많이 모아 지도한 후, 그 과정이 끝나면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방문케 하여 신앙을 권유토록 하고, 자기 자신도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을 권유해서 감화시키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대단히 능란한 언어 구사와 이치에 합당한 말로 교리를 잘 가르쳐서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또한 일처리를 과감하게 하였고 위엄도 있어서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1801년(신유년)에 그녀는 관가에 체포되어 주 신부의 종적에 대하여 신문을 받았으며 주뢰의 고문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변함없이 태연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많은 형고끝에 참형을 당해 순교하였는데 이 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황사영 백서에 나타나 있다. 황사영은 그 당시 강완숙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주문모 신부에게서 영세하여 입교하고 그녀와 함께 활약하였다. 그는 그녀와 매사에 함께 활동하였던 까닭에 그녀의 일거일동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황사영이 그의 백서에 남긴 강완숙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며, 그녀의 전기적 내용으로서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그녀의 활동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그 시대에 강완숙과 함께 활약했던 일련의 부녀자들의 교회 내에서의 활동과 그 읫ㄱ의 개화를 살펴보자. 당시 교회 내에서 강완숙의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과 업적을 몇 가지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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