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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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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1~1801 - (2) 날짜 2004.10.27 11:04
글쓴이 관리자 조회 469
첫째는 명도회 여회장으로서 남인 양반과 중인들로 구성된 남교우들과 더불어 펼쳤던 다양한 선교 활동이다. 둘째는 당시 사족가(士族家)의 부녀자들을 입교시켜 일종의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그들을 교육시킨 최초의 지도자로서, 한국 종교 사상 수도회 성격의 단체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다. 나아가 선교와 교회 자선 사업의 다반사에 참여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확장에 많은 공헌을 한 점이다. 셋째는 가장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중국인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를 6년 동안이나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보호하면서 당시 한국 교회의 모든 일처리를 순조롭게 했다는 점이다. 끝으로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그녀가 불굴의 신앙을 지킨 순교자라는 점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그녀의 업적과 활동의 양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서 그녀의 활동이 한국 초기 교회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강완숙은 선교 활동으로 먼저 그녀의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홍필주를 개종시켜, 그 아들은 후에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려는 황사영 백서에서 "권화전가(勸化全家) 방린급리(旁隣及里)"하였다고 한바와 같이 선교 영역도 대단히 넓어 전 가족은 물론 이웃 동리에까지 미쳤다. 먼저 그는 시어머니를 입교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며 천주교의 신심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릴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시어머니에게 권하고 완전한 회개와 개심을 얻기 위해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 그 결과 마침내 그녀의 시어머니는 가묘(家廟)를 헐어 자신의 미신을 완전히 벗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강완숙은 자기 친정 부모도 입교시켜 임종을 잘 마치게 했다고 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강완숙은 자신의 고향에서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갇힌 교우들을 방문하였고 그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런 뒤에 신앙 생활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상경하였고, 상경한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를 모셔 오는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황과 그의 동료들의 활동에 협력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즉시 신부의 눈에 띄었고 그녀의 활동 역량을 목격한 주 신부는 그녀르르 즉시 여회장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한편, 주 신부는 입국 후 밀고자들 때문에 자신의 소재가 드러난 후부터 강완숙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그가 여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교회 내의 제반 행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모임에서 주인이었던 강완숙은 모든 일처리를 규모 있게 잘 진행했다. 또한 새로 들어오는 신입 교우들에게 교리와 영세 준비 등을 시켰으며, 여러 기록에 의하면 교리 강습회 및 강연회를 자주 집회했다고 한다.
황사영의 진술에 따르면, 강완숙이 주 신부를 보호한 공이 있고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그녀에게 맡겨졌으며, 모든 일을 열심히 처리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사족가의 부녀자들을 많이 입교시켰다. 이는 당시 국법에 역적만 아니라면 양반의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았기에 그들은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그러한 점을 감안해서 천주교를 널리 전파할 기반으로 삼고자 여교우들을 특별히 후대하였으므로 당시 교회 내에 여교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첨례가 행해진 장소로도 강완숙의 집이 으뜸이 되었다. 당시 서울의 첨례가 행해지던 장소로는 [사학징의(邪學懲義)]등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김이우. 황사영. 정광수. 최필제. 손경태 등의 집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완숙의 집에서 거행된 첨례가 횟수로 보거나 참석자의 수로 보아 제일 많았을 것이다. 거기서 거행된 첨례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던 윤점혜의 말에 의하면, 매월 6,7차 또는 10여차 첨례에 함께 모여 기도하였고, 첨례하는 남에는 각처에서 남녀 교우가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매월 첨례를 거행한 것이 적어도 6,7차였다면 그 횟수로 미루어 주일과 판공첨례날만이 아니라 일반 축일에도 첨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이전의 교우가 4천 명에 불과 하던 것이 후기에 1만 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발전의 모든 요인을 강완숙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선교 활동은 폭이 넓었다. 강완숙은 상식과 지식에 재치있는 말재주까지 겸비하였기에 당시 부녀자들을 많이 입교시켰고, 그 중에는 지체 높은 양반집 부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양반 출신의 여교우로는 한신애(아가다)와 그의 딸 조혜의, 홍필주의 일가인 홍정호의 어머니 이소사, 그의 며느리이고 이윤하의 아내이며 이경도와 이 누갈다의 어머니의 권소사, 윤점혜와 윤운혜 자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임소사, 정광수의 누이 동생 정순매, 조 섭의 아내 이 희와 그의 딸 조도애, 죽은 참판 이중복의 아내 신소사 등이 있다. 이러한 사족가의 부녀자들은 거의 강완숙의 선교 활동에 의하여 입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완숙의 특이할 만한 선교 활동은 역시 왕가의 부녀자들과 궁내의 나인들에 대한 선교이다. 즉 강화도에 유배 중인 은언군 이인의 아내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분인의 입교와 영세 및 그들의 순교(사약을 받고 순교됨)는 모두 강완숙의 선교 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폐궁나인인 강경복과 서경의가 그녀의 선교로 입교하였고, 그들을 중개로 하여 폐궁에 남아 있던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와 자주 연락을 취하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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