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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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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1~1801 - (3) 날짜 2004.10.29 16:10
글쓴이 관리자 조회 403
한편 신궁나인 문영인은 강완숙에게 직접 문교한 것은 아니지만 그와 친숙하게 지내면서 교리와 신심을 익혔다. 그리고 그녀는 이조판서 이가환의 동서 박생원 등 남인 명사들과도 자주 연락을 가졌었다. 그녀의 집에 거처했던 주문모 신부와 접촉했던 수많은 남교우 인사들(김의호, 송재기, 황사영, 정광수, 이용겸, 김계원)과도 빈번한 접촉과 상호 교류가 있었다. 이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당시 여성으로 볼 때는 특출한 선교 활동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선교 활동으로 강완숙은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직접 가르치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녀의 집을 왕래함면서 자주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의 제반사가 운영되었으며, 그들은 더욱 신심을 익혔고 교회의 확장을 시도했다. 또한 강완숙은 불행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들을 거두어 그의 집에서 살게 하며 교리를 가르쳤다. 그녀의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던 과부 김순이와 김월임, 그리고 머슴이나 하녀로 있던 김홍년, 김소명, 김정임 등이 모두 그러한 인연으로 입교하였다. 이밖에도 권생원의 비자(婢子)로 알려진 복점, 선혜청의 사고적인 김춘경의 아내 유덕이, 포교 강등녕의 어머니 홍어인애기연이, 청상과부인 이을인애기 등이 강완숙의 인도로 입교하였다.
그녀의 포교는 당시의 양반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상하의 계급적인 구별없이 실행되었다. 이에 상하 계급이 뚜렷했던 조선 사회의 전통적 인습을 완전히 흔들어 놓은 그녀의 평등의식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강완숙의 광범위한 선교 활동 및 강완숙의 집을 중심으로 주일과 첨례날에 모인 각계각층의 남녀 교우들과의 접촉, 각계각층의 신자들과 연락을 긴밀히 한 관계로 해서 강완숙에 대한 관찬기록이나 실록 등은 그녀를 "스스로 사학의 괴수가 되어 여러 곳의 남녀 교인들을 불러들여 밤낮으로 강습하여 곳곳마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일세(一世)를 미혹케 하였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그 아들의 공술에서도 "일가노소를 교유하고 각처의 사흉(사凶)과 체결(締結)하여 소굴을 만들어 스스로 사괴가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선교 활동의 범주가 어떠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강완숙이 당시 초기 교회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이며 또한 그녀가 체포되어 생명을 잃게 되는 원인이 역시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 보호하여 초창기 한국 교회의 확장을 도왔던 점이다. 그녀는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즉 강완숙은 남녀 칠세 부동석을 운운하는 당시 유교 사회의 인습으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많은 사료나 기록에서 그너의 '주문모 신부 은닉 사건'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데,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은닉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달레는 다음과 같이 장황하게 언급하였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가 서울세 도착하기 이전에 벌써 서울에 도착하여 지황 등의 신부 영입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원으로 활약한 것 같다. 그녀는 주 신부를 영입하는 데 수용되는 모든 비용의 거출이나 경비를 담당하였다. 주 신부가 입국하자 강완숙은 주 신부에게서 정식으로 영세를 하였다. '골롬바'라는 교명은 이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 신부가 국내에 들어온 것이 알려져서 그가 포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강완숙은 그를 구할 수 있다는 용감한 생각을 하였다. 즉, 그녀는 주 신부가 사상 최초로 입국한 이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성직자의 존재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귀한 것이며 중대사인가를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힘으로 신부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녀는 우선 자기 집 장작 광에 주 신부를 숨기고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 그곳으로 음식을 날랐다.
그는 주 신부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를 마련하여 드릴 수 없는 것을 괴로워하여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그 한 방편으로 계속하여 울며 기도하고,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묻게 되었다. 강완숙은 주 신부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인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조선 사람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피신시킬 곳도 없게 되었다는 것과 남장을 하고서라도 사방을 다니면서 신부님을 보호하여 피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그의 시어머니는 "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니 나도 너를 따라가서 함께 죽겠다."고 하였다. 이때 강완숙이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 보고 매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공연히 위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며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천주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을 우리 있는 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주신다면 저는 곧 아믕ㅁ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시어머니는 "너하고는 떨어지기는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하고 승낙하였다. 강완숙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를 안사랑에 모셔들였다. 주 신부는 거기서 외부 사람들이 양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 관습의 보호로 6년간 머물렀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달레가 [한국 교회사]에서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은닉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황사영 백서]와 [사학징의] 및 [실록]등의 관찬 기록에서는"주문모 신부를 숭봉(崇奉)하여 골롬바라는 이름을 받고 6년 동안 숨겨 두었다."라고 하였으니, 6년간이나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면서 교회 안에 모든 집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의 기록으로 보아 그녀가 당시 조선 초기 교회의 남녀 교우들 중에서 얼마나 중요한 활약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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