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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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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1~1801 - (4) 날짜 2004.11.10 10:50
글쓴이 관리자 조회 359
1801년 초부터 신뷰박해가 발발하여 신자들의 체포령이 내려, 2월 24일에 강완숙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천주교인 가운데서도 가장 간악한 요녀로 취급되었다. 주 신부의 행방을 찾는 관리들을 그녀에게서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온갖 악형을 가했다. 그녀가 이와 같은 혹형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감내하는 것을 목격한 형리들은 그녀를 '귀신'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더욱이 그녀는 옥중 관리들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모든 고금의 성현들을 끌어내어 천주교와 비교 설명했기 때문에 관리들마저 마지않았다고 한다. 관리들이나 수감자들은 그녀를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자", 혹은 망연자실한 정도로 "놀라운 여자"라고 표현했다. 형리들은 그녀를 배교시키려고 더욱 잔혹한 형벌을 그녀에게 가하였으나 언제나 실패하였다.
그녀는 양반가의 부인으로는 당시의 어떤 형법 조목에도 없는 예외의 특령에 의하여 체포되어 많은 법외의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초자연적인 인내심으로 이 형벌을 이기면서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대거나 배교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를 해설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그녀는 옥중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의 하나는 그녀와 함께 체포되어 다른 옥에 갇혀 있었던 그녀의 전실의 아들이며 그녀와 함께 상경했던 홍필주(필립보)가 혹심한 형벌로 인해 마음이 약해져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 그녀는 아들이 옥에서 법정으로 나가는 어느 날 먼발치로 아들이 보고 큰소리로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 복을 생각하여라. 예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너는 눈이 어두원져서 스스로 멸망할 수 있겠는가?...."라고 격려하였다. 그 아들은 결국 끝까지 배교하는 일 없이 몇 달 후에 순교하여 순교자들의 반열에 기록되었다.
또한, 그녀는 옥에 갇혔을 때 주 신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자락을 찢어서 주 신부의 사도적인 업적을 기록하였다. 그녀의 의식 속에는 한 위인의 행적을 길이 남기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단 조각은 이를 맡았던 여교우의 소홀로 불행히도 없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강완숙은 열렬한 기도 생활과 신심으로 함께 옥에 갇혔던 다른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많은 약한 여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려는 마음밖에 없었으며,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갈망하였다. 그녀는 죽기 전날 기쁨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드디어 그녀는 신자들, 즉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김연이, 강경복, 한신애, 문영인 등과 함께 5월 23일(양력 7월 3일)에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은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로 몸을 돌려 말하기를 "국법에서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하고 있으나, 여인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라고 하여 그 허락이 떨어져서 옷을 입은 채 십자 성호를 긋고, 맨 먼저 머리를 형리들에게 내밀어서 참수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녀는 남다른 생애를 살았고, 그 당시 여성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혁명적인 행동가 비록 교회 내에서였지만 엄청난 사회 활동을 했다. 사회적으로 개척적인 조선 시대 여성상을 구현함으로써 한국 여성사에서 지울 수 없는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남녀 신도 가운데 가장 큰 활약으로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내외에 명성을 떨쳤던
강완숙은 사족가의 부녀자로서 당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가리지 않고 선교하였다. 또한 강완숙은 그 시대의 여성으로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습 때문에 당해야 했던 억압이나 유교적인 제한 등 당시 여성의 한계성을 극복하면서 자유롭게 행동했던 측출한 여성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역량과 능력은 역시 천주교라는 종교의 신앙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이웃에 대한 형제애"를 실천했으며, 남녀의 차별이나 계급간의 차별을 넘어선 평등 사상을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유교적인 봉건사회에 대하여 어떤 도전을 했다든지, 여필종부나 가부장적 제도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그녀 활동 영역에서 그런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유학적인 당시 사회의 교육이나 전통이 강완숙의 새로운 종교 활동에 오히려 하나의 기반으로 이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많은 역사가들은 신유년 박해 이전에 한국 천주교가 그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강완숙의 선교 활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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