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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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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의 가시밭길, 그 흔적을 더듬어 날짜 2003.01.07 13:41
글쓴이 관리자 조회 293
고난의 가시밭길, 그 흔적을 더듬어
청주교구 류한영 신부(배티성지 주임)를 단장으로 한 순례단 16명이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최양업 신부의 수품장소인 상해교구 서가회 주교좌성당. 중국 개교(1603) 5년후인 1608년 명말의 문신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그의 향리 서가회에 천주당을 세우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개교 60년이 되었을 때 상해의 신자수가 4만명을 기록했고(성당 2개, 소성당 16개) 18세기초에는 8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가회 주교좌는 예수회가 세 번째로 지은 성당으로 문화혁명 때 첨탑 등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1979년 다시 문을 열면서 전체를 보수했고 성당 옆에 새로 증축하고 있는 신학원 건물은 완공단계였다.

신학원은 1847년 예수회 선교본부로 건립한 것인데 최양업이 마레스카 강남교구장으로부터 사제품을 받기전 신학공부를 계속한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의 수품(1849년 4월)은 김대건 신부보다 4년 가량 늦었다. 서품권을 가진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최양업은 조선땅에 들어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좌절된다. 1847년 여름 라 피에르 군함을 타고 귀국길을 탐색하던 중 배가 고군산도 부근에서 난파하자 최양업은 섬에 상륙하여 남고자 하였으나 함장이 거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류한영 신부는 강론을 통해 좬그 때 최 신부님이 입국에 성공했더라면 틀림없이 순교하셨을 것인데 12년 동안 교회의 중추를 놓게 된 은총으로 봐야 한다좭고 말했다. 최양업은 수품 후에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를 통한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상해로 다시 왔다가 요동반도로 가서 성무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최양업은 최초의 해외선교사다.

<신정식 기자> tomas@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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