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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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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풍,배티성지 안내 날짜 2003.01.07 13:47
글쓴이 관리자 조회 416

[1] 연풍성지 안내

위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문의: 연풍 성지(0445: 833-5064, Fax: 0445: 833-3386)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국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선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구름도 쉬어 넘는다지만 산이 높은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선인들이 새재로 불린 험한 길을 처음 내고 넘나들면서부터 고갯길 구비구비 서린 슬픈 내력들에 구름인들 차마 어찌 그냥 넘어설 수 있었으랴.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 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2·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운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읍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는 최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옯겨져 묻힌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가(1811-1866년)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킨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서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못했다. 병인박해 때는 다블뤼 안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한다.
연풍에는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 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 됐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연풍성지와 관련하여 선종하신 오기선(요셉) 신부님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2] 배티성지 안내
위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문의: 배티 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인적이나 차량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해 전국 방방곡곡 거미줄처럼 도로가 뻗어 있는 오늘날에도 그 고적함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여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 인근에는 명승지와 성지들이 많이 있어 시간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함께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안성에서 미리내 성지를 거쳐 용인 민속촌과 자연 농원 또는 죽산 칠장사를 거쳐 양지에 있는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 터를 갈 수 있다. 또 남쪽으로는 유관순 기념관과 독립 기념관 그리고 온양 온천이나 현충사를 가는 것도 가능하다.
배티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진천으로 가서 백곡을 거쳐 들어간다. 진천에서 백곡행 버스나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백곡에서 배티까지는 약 4킬로미터 정도 이므로 도보로 순례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진천에서 18킬로미터 정도 지점에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백곡 공소가 길 왼쪽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박씨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친시누이올케 간으로 그 후손이 현재 평택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순례객은 여기서부터 순교선조들의 향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배티까지는 약2킬로미터 정도로걸어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길은 박해 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 통로 였는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은 믿음 하나로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 선조들의 가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이 묘소만이 남아 있다.
푯말이 서 있는 곳에서 안성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드디어 배티 사적지가 나온다. 성지로 오르는 산길 맨 앞에서 '순교 현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았던 선조들의 굳은 정신이 단단한 비석을 통해 느껴진다.
왼쪽으로 사제관을 두고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당시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둥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 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공소 터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오솔길을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길가에 초소가 있고 오른쪽으로 집이 몇 채 보이는데 그 뒤가 바로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곳이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잤다는 최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성교 공과」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던 바로 그 공소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직 그 자리를 알려 주는 녹슨 푯말만이 옆으로 기울어진 채 남아 있어 후손들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고갯길을 따라 9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무명의 숨은 꽃'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 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순교자 묘가 안장되어 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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