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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대건, 최양업 신부 관련 사적지 날짜 2003.01.07 13:51
글쓴이 관리자 조회 393
차기진

1. 이국 땅의 우리 사적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최초의 한국인 신학생이요 사제였으며,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먼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직접 배운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은 외국 땅에 이르기까지 가장 멀리,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고난의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바로 이땅의 복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들로서는 이것이 곧 억압받는 민초(民草)들과 조선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1836년 초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 후동(后洞)의 모방 신부 댁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해 12월 3일(음력 10월 25일)에 모방 신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신학생으로서 선서를 하였다. 모방 신부는 당시 선발된 지 4-5개월밖에 되지 않은 김대건은 제외하려고 하였지만,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마지막에 그를 포함시켰다. 조선 신학생들은 이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곧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함께 조선 밀사들에게 안내를 받아 중국의 국경 관문인 봉황성의 책문(柵門)으로 떠났다. 이에 앞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샤스탕 신부는 약속대로 12월 25일에 이미 책문에 도착하여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신학생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후 그들은 샤스탕 신부가 정해 준 2명의 중국 밀사들과 함께 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곳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극동 대표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들의 교육을 부탁받고는 대표부 안에 임시로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모방 신부의 1836년 4월 4일자 및 12월 3일자 서한”,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35. 45-47면.
이로써 마카오 대표부는 비록 중국 땅에 있었지만, 최초의 조선 신학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의논하여 ‘요동 신학교’의 설립을 계획했었는데, 라틴어 공부와 박해의 위험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 계획을 취소하였다. 같은 책, 33면.
이후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에 프랑스 군함을 타고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년여를 이곳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두 차례의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하였으니, 동료 최방제의 죽음과 마닐라로의 피신이 그것이다.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위열병에 걸렸다. 그리고 1837년 11월 27일에는 친구들의 슬픔을 뒤로 한 채 십자고상에 입맞춤을 하면서 죽고 말았다. 이어 1839년에 김대건과 최양업은 광동과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소요가 일어나자, 몇몇 선교사들과 함께 4월 6일 마카오를 떠나 소서양(小西洋)으로 불리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마닐라에서 약 70km 떨어진 수도회의 ‘롤롬보이’(Lolomboy) 농장으로 가서 계속 수업을 받게 되었다. 같은 책, 101-103. 107면.
그들이 마카오 신학교로 귀환하기 전까지 이곳에 체류한 것은 5월 3일부터 약 6개월 반이었다.
롤롬보이에 있는 동안 조선 신학생들은 조선의 밀사들인 조신철(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북경에서 보낸 1839년 3월(3월 10일 또는 3월 11일)의 서한 1통을 받고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의 조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때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는 훗날 조신철을 통해 전달되었다.
사실 마카오 신학교는 따로 교사(校舍)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고, 전담 교수가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초대 교장 칼르리(Callery) 신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지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중국 선교사들이나 대표부의 신부들이 겸하여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따라서 신학생들의 거처와 교실은 대표부 안에 있던 작은 방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은 틀림없는 조선 신학교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여기에서 배운 신학 교육을 바탕으로 훗날 사제품에 오를 수 있었다. 현재 마카오에 있던 외방 전교회의 대표부 건물은 아파트로 바뀌어 옛 모습은 사라졌다. 반면에 조선 신학생들이 잠시 거처하던 롤롬보이 농장의 한 쪽에는 조선 교회의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1986년 건립한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있다. 또 그들이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었다는 자리에는 오래된 ‘망향의 망고 나무’가 자라고 있다.

2. 만주의 소팔가자와 상해의 금가항

184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함대가 이권을 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에 입항하게 되자, 김대건은 2월 15일에 스승이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몸을 싣게 되었다. 이어 최양업도 7월 17일에는 만주 선교사인 브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 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이 때 프랑스 함대에서는 통역이 필요했고, 조선 신학생들과 매스트르 신부는 이 기회에 조선에 입국하는 길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8월 말에 양자강 하구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장 세실(Cecille)이 더 이상의 북상을 꺼려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10월 23일에는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이곳에서 체포될 위험을 가까스로 면한 그들 일행은 이웃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으로 가서 그곳 회장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후 최야업은 먼저 요동반도 북단의 개주 인근 ‘양관’(陽關) 교유촌을 거쳐 11월에는 길림성의 장춘(長春)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유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중에서 양관 교우촌을 그후 1843년 12월 31일에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개최된 곳이다.
한편 백가점에 남아있던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해 홀로 봉황성 책문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 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김 프란치스코는 1831년경부터 조선 교회의 밀사로 활동하였으며, 1844년에는 만주 봉천(奉天)으로 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났고, 그 해 말에는 김대건 부제를 조선에 영입하였다. 그리고 1882년부터 기해, 병오 순교자드의 시복을 위한 교회 재판이 시작되자 1884년에 73세로 법정에 나와 김대건 신부에 대해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차기진 역주,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교회사 연구] 제 12집, 1997, 269면 참조).
를 만난 뒤 12월 2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땅을 밟게 되었으나, 신분이 노출되자 곧 바로 백가점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런 다음 1843년 3월에는 다시 책문으로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가서 최양업과 합류하였다.
‘소팔가자’ 교우촌은 본래 만주의 한 작은 교우촌일 뿐이었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르(Verolles, 方) 주교가 1841년에 이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고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매스트르 신부, 그리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곳 성당은 훗날 폐허가 되었다가 유명한 의화단 사건을 겪은 뒤인 1908년에 재건되었다.
페레올 주교 아래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던 김대건은 1844년 초에 북방 입국로를 탐색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2개월 동안 훈춘을 거쳐 조선 동북방 국경에 있는 경원까지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그런 다음 그해 12월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1월에는 책문에서 조선의 밀사를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김대건 부제가 서울에 잠입하여 매입한 집이 바로 ‘돌우물골’(石井洞)의 초가집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소공동에 있는 조선 호텔 옆으로, 기록에는 “돌우물골의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집” 규장각 소장, [海西文牒錄], 병오 5월, 船主林成龍更推.
으로 나온다. 훗날 페레올 주교도 조선에 입국한 뒤 이 집을 주교관으로 삼아 거처하였다.
돌우물골에서 약 3개월을 지낸 그는 4월 30일에 마포를 떠나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8월 17일에는 그곳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약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현재 이곳 금가항과 횡당 성당에서는 정기적으로 김대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한국인 신자들도 자주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3. 제주 비양도와 강경의 나바위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31일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 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그 배는 앞서 김대건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마포에서 타고 간 것으로 도저히 서해를 건널 수 없는 작은 배였고, 실제로 그들 일행은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배였으므로 중국 배와는 달리 해안에서 발각될 염려는 아주 적었으며, 이에 페레올 주교는 서슴지 않고 그 배를 택한 뒤 김대건 신부를 선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조각 배로 다시 서해를 건넌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상해를 떠난 지 얼마 안되어 만난 풍랑으로 라파엘 호의 갑판은 부서지고, 키는 부러졌으며, 돛은 찢어져 버렸다. 할 수 없이 그들 일행은 돛대를 잘라버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렇게 하여 김대건 신부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제주도 서쪽은 작은 섬 ‘비양도’(飛揚島)였다. 이곳에서 물과 식량을 얻은 일행은 처음의 계획을 바꾸어 곧바로 서울로 가지 않고 충청도 강경 인근의 작은 교우촌 ‘나바위’(羅岩)로 가기로 하였다. 체포의 위험 때문이었다. “페레올 주교의 1845년 10월 29일자 서한”,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269-289면.

10월 12일에 그들은 고대하던 조선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지만, 그들의 입국은 찬란한 것은 못되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면서 모든 것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바위 신자들은 서양 사람의 얼굴과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페레올 주교에게 변복을 시켰다.
그들(나바위 신자들)은 내(페레올 주교)가 상복 차림으로 배에서 내리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굵은 베로 만든 겉옷을 걸쳐주고, 머리에는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를 씌웠는데, 그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자는 반쯤 접은 작은 우산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내 손에는 두 개의 작은 막대기가 들렸는데, 거기에는 헝겊이 달려있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내 열굴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같은 책, 285-287면.

얼마 동안을 나바위 교우촌에서 머무르던 김대건 신부는 11월 초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으며, 이내 돌우물골과 미나리골(서대문구 미근동), 쪽우물골(남대문로 남정동) 등에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뒤 고향 골배마실로 내려가 모친과 상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이웃 은이 공소를 사목 활동의 터전으로 삼아 경기도 일대를 순방하였다.
1846년 4월 13일 골배마실을 떠난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서해 해로를 통한 안전한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마포를 출발, 5월 25일에는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인근에서 중국 어선을 만나 편지와 지도를 중국의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한 그는 6월 1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으로 귀환하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런 다음 해주 감영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다시 40여 차례나 문초를 받은 후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성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1997 참조.
그는 옥중에서 여러 차례 편지를 썼는데, 그중 스승 신부들과 동료 최양업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끝까지 형벌을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한국교회사연구소, “김대건 신부의 1846년 6월 8일자 옥중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1996, 359면.


4. 상해의 서가회 성당과 배티 교우촌

한편 소팔가자에 남아있던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월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의 훈춘을 거쳐 두만강 가까이 갔지만, 경원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그곳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어 그해 말에는 조선의 서북쪽인 압록강 근처로 갔다가 조선의 밀사들에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과 병오박해(丙午迫害) 소식을 듣고는 홍콩으로 건너갔다. 당시 파리 외방 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그곳으로 이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에 머물면서 조선 순교자들의 전기를 라틴어로 번역하던 최양업 부제는, 1847년 7월 28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원정에 나선 프랑스 군함을 타고 전라도의 ‘고군산도’(古群山島) 인근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군함 한 척이 난파하는 바람에 잠시 그곳에 상륙하였다가 상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최야업은 조선에 남도록 해달라고 라피에르 함장에게 부탁하였지만, 그의 청은 거절되고 말았다. 2년 뒤에 그는 김대건 신부의 편지에 따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한 번 백령도를 통하여 입국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849년 초 최양업 부제는 상해에 있던 예수회의 ‘서가회’(徐家匯) 신학원에서 마지막 공부를 마쳤고, 4월 15일에는 마침내 그곳 대성당에서 매스트르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게 되었다. 史式徵, [江南傳敎史], 218. 225면 참조.
이 서가회는 1773년에 해산되었다가 1813년에 부활된 예수회가 다시 중국에 진출하면서 마련한 전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최양업 신부는 곧 조선 입국을 위해 요동으로 가서 기회를 엿보며 만주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아래서 성직을 수행하였다. 베르뇌 신부는 1854년에 제 4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바로 그분이다. 이곳에서 최 신부는 1849년 11월 3일에 매스트르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함께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양인이 육로로 입국하기에는 위험하다.’는 조선 밀사들의 만류 때문에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12월 3일, 단신으로 조선에 입국해야만 하였다. 실로 15살의 나이로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와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용인 한덕골로 가서 중백부인 최영겸과 기해박해 이후 그곳에 살고 있던 넷째 아우 최신정(델레신포로)를 만났다. 아마 이때 산너머 골배마실에 거주하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모친 우르술라도 만났던 것같다. 이어 그는 사목 순방에 나서 충청도 ‘도앙골’(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6개월 동안 5개 도를 순회하였으며, 그 해 말에는 ‘배티’(梨峙,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교우촌에 거처하면서 인근 교우들을 돌보았다. 이곳은 전형적인 교우촌 골짜기로, 그의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던 동골을 비롯하여 절골, 삼박골, 불무골 교우촌이 산재해 있었다. 또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은 이웃의 목천 서덕골(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백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고난의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의 자세로 이 고난을 달게 받았으며, 언제나 착취와 억압 아래 놓여있는 하층민 신자들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언제는 그는 “비참하게 지내는 민초(民草)들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가슴을 앓던 목자였다. 이에 그는 무지한 신자들을 위해 틈틈이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거나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에는 경상도의 ‘죽림’(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에서 성사를 집전하다가 경신박해(庚申迫害)를 만나 그 뒷산의 굴에서 숨어 지낸 적도 있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가련한 조선 포교지를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였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배티 사적지 편, “1860년 9월 3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319면.


5. 마지막 안식처 배론

사목 순방 중에 최양업 신부는 언제나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의 활동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고, 대신 감당해 줄 수도 없었다. 실제로 그가 담당한 지역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갈 수 없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지역의 산간 오지에 숨겨있는 교우촌들이었으니, 훗날 베르뇌 주교는 그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는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조재였던 유일한 본방인(本邦人) 신부였습니다. …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곳은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교우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티 사적지 편, “베르뇌 주교의 1861년 9월 4일자 서한”,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7, 247-249면.

이처럼 그가 조선으로 귀국하여 활동한 기간은 약 12년이었다. 그 동안 그는 수많은 신자들을 찾아내 성사를 줄 수 있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순방을 끝내면 문경의 ‘새재’(鳥嶺)와 충청도 ‘연풍’(延豊)을 거쳐 ‘배론’(舟論,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로 가서 선교사들과 함께 쉬곤 하였다. 이중에서 새재는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경상도로 이주하던 신자들이 넘던 고개였는데, 그 때문에 포졸들이 언제나 연풍 주막에 머물면서 범죄자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또 이곳은 교회 초창기에 복음이 전파된 지역으로 훗날 순교하는 황석두(黃錫斗, 루가)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25세 무렵인 1837년경에 연풍 일대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입교하였다.
한편 배론은 이미 교회 초창기에 교우촌이 형성된 곳으로, 1801년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이 이곳 옹기점에 숨어 지내면서 [백서](帛書)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후 이곳 교우촌은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폐허가 되었으나 다시 신자들이 복구하였다. 또 1855년에는 한국 교회의 장상인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제공한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여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자주 이곳에 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1861년 초여름, 그 해도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한 뒤 교구장 베로뇌 주교에게 성사 집전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그런나 누적된 피로가 더 이상 그의 몸을 지탱해 주지 못하였다. 특히 경신박해는 그의 교우촌 순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낮에는 80리,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했고,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는 일을 되풀이하였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쉴 수 있는 날은 나흘 밤을 넘지 못하였다. 이로써 결국 그는 6월 15일 문경의 한 신자집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그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배론의 프르티에 교장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와 ‘예수 마리아’를 힘없이 부르는 그에게 병자성사를 줄 수 있었다. 같은 책, 245-247면 참조.

푸르티에 신부는 우선 최양업 신부의 시신을 문경에 가매장하였다. 그런 다음 베르뇌 주교와 의논하여 1861년 11월 초에는 그 유해를 배론 뒷산으로 옮겨 안장하게 되었다. 그 후 배론 교우촌과 신학교는 병인박해로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으며, 푸르티에 신부아 장주기 회장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과 충청도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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