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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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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신유박해(1801) 경위-1 날짜 2004.07.05 12:00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2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당시 조선후기 사회의 제반 사정에 걸친 모순을 자각했던 남인학자들의 서학운동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사회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모순을 타개해 보려고 새로운 학풍을 개척한다든지 혹은 실학 운동을 일으키면서 성리학을 비판하는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들은 때마침 중국(청)에서 조선 사신들로부터 전하여 들어온 명말정초 중국에 들어와 활동했던 서양 선교사들이 서술한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들을 수행 사신들에게 얻어보았고, 거기에서 그들이 당시 처해 있었던 어떤 사회적인 탈출구를 마련하고자 그들 스스로가 천진암 주어사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러한 강학회에서 그들은 스스로 알게 된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자 하여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는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성서를 비롯하여 많은 교리서와 성물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이승훈을 북경에 보낸 주동인물이었던 광암 이벽은 서울 수표교에 집을 한 채 세내어 그곳에서 이승훈에게서 건네 받은 모든 천주교 서적들을 다시 검토 연구하였으며, 그 후 이승훈에게서 요안세자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고 본격적인 천주교의 고단 조직과 집회 및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공적 집회는 바로 중인인 김범우(토마스) 집에서 열린 '명례동 집회'였다. 이 집회에서의 천주교 전례는 비록 한계성을 지닌 것이기는 하나,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듣고 배워온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거행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집회도 얼마 안되어 을사년(乙巳年)에 관에 적발되었는데 이것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이들 남인과 가족들은 놀라서 이들에게 심한 가정적인 박해를 하게 되었고, 결국 최초의 조선 천주교회의 전례와 집회를 주관하는 데 있어서 주동 역할을 했던 광암 이벽은 혹심한 가정적인 박해로 그 이듬해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 이후 초기교회에서 매우 열심했던 권일신(사베리오)은 모처럼 자체적으로 조직한 조선교회의 숨져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광암 이벽의 뜻을 이어받아 그 자신이 스스로 조동섬(유스띠노)을 데리고 용문사로 가서 8일간 피정을 하고 나서 다시 새롭게 교회를 수습하고,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흩어졌던 초기 교회 주역들인 이승훈과 정다산 형제 등을 다시 불러모았다.
그리하여 그는 1787년에 가성직자교단(假聖職者敎團)을 조직하였는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권일신이 주교직을 맡고, 그 외의 이승훈, 정씨 형제들인 정약전, 약용, 이존창(루도비꾜 곤자가), 최인길(마티아), 최창현(요한), 유항검(아우구스띠노), 홍낙민(루까)등이 신부가 되었다. 이들 가성직자들은 교회 전례를 위한 집회에 있어 모든 성무를 거행하였으며 지방에까지 포교 활동 범위를 확산하였다.
이때 충청도 지방은 이존창(루도비꼬 곤자가)이 맡게 되었는데, 그는 충청도 여사울에서 농사짓는 집의 아들로서 학업과 문리에 뛰어났었고 그때 마침 권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천주교 교리를 배워 영세를 받았다.
영세받은 뒤에 그는 권일신의 지시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일가와 친척을 권면하여 천주교에 입교시켜 마침내 충청도에 많은 교우를 얻게되었으며, 그는 충청도 천주교회의 못자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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