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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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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신유박해 경위(1801)-2 날짜 2004.07.06 10:58
글쓴이 관리자 조회 424
한편 전라도에서는 유항검 아오스딩이 친척인 정씨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배워 영세받고 최초로 천주교를 이곳에 전파하였다. 또한 유항검은 덕망과 재산을 겸비하여 그의 집이 있는 전주 초남이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에 대단히 헌신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가성직자단(價聖職者團)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현천(아마도 유항검의 호인 듯 하다)이 자신들의 사제직수행과 미사나 성사집행이 무효일 뿐만 아니라 독성죄가 된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시 이들은 긴급 회의를 열고 성사 집행을 중지하였으며, 동시에 1789년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에게 사죄의 편지를 써서 윤유일을 밀사로 하여 보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듬해 구베아 주교의 답서를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가성직자들은 모든 성직 수행의 업무를 중지하였으며 영세 이외에 다른 성사를 집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즉 일반 신자로서의 역할만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791년(신해년)에 다시 전라도에서 일어난 큰 박해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전라도 교우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버)등이 윤지충의 모친이 사망하자 신주를 소각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박해였다. 이 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은 물론이고 권일신 사베리오도 이 일에 관련되었다 하여 체포되었으므로 또 다시 한국 초기 교회는 수난ㄴ을 당하게 되었고, 지도자였던 권일신은 온갖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로의 유배명령을 받았다가 다시 예산으로 옮겨져 가는 도중에서 장독(杖毒)으로 임종하게 되었다. 이 신해박해는 지방 교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수난이었다.
신해박해 이후 1795년 조선교회는 처음으로 입국한 주문로 신부를 맞이하여 다시 생기를 찾게 되었고, 이때 4천명의 교우들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으며 한국 교회는 그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강 골롬바 여회장 집에 머무르면서 각지로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자기를 인도하여 들어온 여주 고을 윤유일(바오로) 집에도 갔었고, 전라도 초남(草南)이까지도 가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조선의 초기 천주교회는 국내 신도들의 자생적 노력과 여신도들이 내외적으로 실현한 봉사 활동과 남인학자들의 정치적 배경 등이 작용하여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주문모 신부의 입국 및 선교활동에 힘입어 그 교세가 크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799년 1월, 천주교를 뒤에서 감나히 묵인하였던 남인 시파(時派)의 영수이며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사망하고,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6월 28일에는 남인학자를 애호하던 정조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창덕궁에서 긍하하였다. 이에 남인들은 노론의 김대와대비에 의해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대부분의 남인들이 믿거나 받들던 천주교에 대해 최초의 대박해가 가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유박해의 시작이었다.
즉 정조가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은, 그이 계조모로서 1762년에 정조의 부친이었던 사도세자를 굶어죽게 한 김 대와대비 정순황후의 농건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정조의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왕 순조가 1800년 7월 4일에 창덕궁에서 즉위하니, 그때 세도를 떨치던 노론계열의 김대왕대비 정순왕후는 희정당(熙政堂)에서 나와서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유박해의 원인은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버니인 김구주가 정조 즉위년(1776)에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죽일 것을 상소한 죄로 흑산도에 귀양갔다가, 나주로 옮겨져 1785년에 죽게 된 원수를 갚으려고, 정조가 승하하자 정조가 감쌌던 남인 시파인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유년에 박해의 화살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김 대비는 1800년 11월 17일에는 형조로 하여금 교인 최필공을 체포케 하고, 19일에는 그의 사촌인 최필제를 체포케 하여 대 박해를 시작하였다. 또한 신유년(1801) 1월 9일에는 조선 교회 총회장 최창현을 체포했고, 다음 날에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써서 천주교 신도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박해는 계속되어 2월 5일에는 내포의 이단원을 체포했고, 9일에는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홍낙민을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을, 24일에는 여회장 강완숙과 그 가족을 체포하였고, 이어 많은 교우들을 체포하여 경성의 의금부, 형조, 좌우포도청과 지방 감영의 옥이 모두 천주교인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체포된 많은 천주교인들은 양반, 상민, 천민이거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혹은 배교를 선언하여 귀양을 가거나 혹은 옥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양반들이었던 주모자들은 참수형에 처해졌다. 다시 2월 24일에는 권철신, 25일에는 이가환이 각각 고문 끝에 옥사했고, 이어서 정부는 26일에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최필공, 최창현 등을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에 처했으며, 이단원을 충청도 감영으로보내어 참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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