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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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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신유박해 경위(1801)-3 날짜 2004.07.06 11:21
글쓴이 관리자 조회 393
한편 천주교에 대하여 묵비권을 행사했던 정약전.약용 형제는 2월 26일 사형을 겨우 면하고 각각 전라도 강진군 신지도와 경사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었으나, 후에 황사영 백서(黃嗣永 白書)사건으로 조카사위 황사영이 처형되자, 각각 전라도의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박해가 심하게 된자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이번의 큰 박해가 일어나게 된 줄로 여기고, 강완숙의 집을 떠나 폐궁에 잠깐 숨어있다가 비밀히 서울을 떠나 국경 지방인 의주를 거쳐 국외로 탈출하여 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한국 교회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정부 당국의 박해의 초점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 신자들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생하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그 해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주 신부는 청나라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16일에야 간단한 문초를 받고 한달 동안 갇혀 있다가, 4월 19일에 처음으로 30대의 매를 정강이에 맞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많은 형리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形, 목을 잘라 말뚝에 매다는 형)을 받았다.
주 신부가 의금부 옥에 갇힘에 따라 그에게 영세를 받은 왕족 송마리아, 신마리아 부인들도 3월 26일 경희궁에서 사약을 받고 순교하였다. 송마리아의 남편으로 강화도에 귀양가 있던 은언군은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5월 29일에 사사되었다. 한편 주 신부를 숨겨주었던 강완숙 골롬바는 가장 잔인한 형벌인 주뢰형을 여섯 번이나 받고, 5월 23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궁녀 강경복, 문영인을 비롯한 9명의 남녀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 신유년 박해는 다시 지방으로 확산되어, 그 해 4월에는 전주에서 유항검. 관검형제, 윤지현, 이우집, 김유산이 체포되어, 5월 16일에 서울로 압송되었고, 곧이어 이 지방교우 2백여 명도 잡히게 되었다. 서울로 끌려온 유함검 등 5명은 이후 넉 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9월 11일에는 다시 전주로 보내져서 참수되었으나, 그 외 그 곳 교우들 중에서 배교를 선언한 146명은 귀양가거나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항검과 같이 잡혔던 그 아들 유중철 요한은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10월 9일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아내이며 왕족 이윤하의 딸이던 이순이 루갈다는 그 시어머니 신희, 시숙모 이육흐와 함께 신유년 말인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 서울에서 체포되어 권철신의 양자이던 권상문 등 15명과 함께 12월 26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신유 대박해는 옥중에 아직 남아있던 신자들을 그 해 마지막 날까지 모두 처형함으로써 겨우 끝을 맺게 되었는데, 이 박해에서 순교한 교인은 무려 3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김 대비는 박해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10월 21일에 "성학(聖學)을 더욱 존숭(尊崇)함으로써 사학(천주교)을 근멸하도록 하라"는 토사교문의 교서를 내렸는데, 그것은 새해에 순조가 왕비를 맞게 되어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피흘리는 박해를 종식 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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