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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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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승훈(李承薰).베드로-1756-1801---1 날짜 2004.07.08 11:16
글쓴이 관리자 조회 393
이승훈은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 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북경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의 교리책을 연구하다가 몸소 북경에 들어가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회를 이 땅에 처음으로 세운, 한국의 베드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강원도 평창이 본관인 참판 이동욱의 맏아들로서, 1756년에 한성부의 서부 반석정(中林洞)에서 태어나 자를 자술(子述) 또는 계경(繼卿), 호를 만천이라 일컬었다.
아버지는 1766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사,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낸분으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얻었으며, 어머니는 남인의 실학자 이익의 증손녀이며 당대 일류의 문장가이던 이가환의 누이였다.
이와 같이 지체 높은 양반집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승훈은 재주가 뛰어나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익혔으며, 10세 때부터 경서를 읽기 시작하고, 20세 때에는 그 이름이 선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한 유명한 다산 정약용의 누님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 처남들과 더불어 특히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의 학술서를 많이 읽고 연구하였다. 또 그는 옛 성현들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하여 학문과 덕행으로써 보다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고 스스로 덕을 닦는 데 힘썼다.
또한 이승훈은 24세를 전후하여 그의 집이 있던 서부에서 선비들과 더불어 향사례라는 활쏘기 모임을 열었는데, 이 모임에 모인 선비가 1백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도 그는 학문을 닦는 데 힘써서 25세 때에는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를 치를 공부를 하는 한편, 동지들과 더불어 천주교를 연구하고 이를 믿고 있었다.
1783년 겨울에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가게되었는는데, 그는 천주교 교리 연구회를 지도하던 이벽의 권유로 그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 이때 이벽은 이승훈이 북경 사절단에 들어가 자기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즉시 그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우리의 마음과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과 백성의 본분을 어떻게 구분하여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의 원리며, 천체의 운행규칙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 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라고 하였다.
종교 서적을 아직 모르고 있던 이승훈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고 감탄하면서 그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느느 이벽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은 이에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의 학자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 행위를 자세히 알아보며,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혼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있으니, 북경에 가거든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이벽의 마음속에는 학문보다도 종교에 대한 갈증이 더욱 절실하였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미 그의 마음을 움직여, 그에게는 영혼을 구하는 일이 유일하고도 중대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승훈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은 그것을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것을 약속하였다.
이승훈은 드디어 1783년 말경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남당(南堂)을 찾아가 북경 주교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당시 북경 주교였던 알렉산델 드 구베아(de Gouv'ea)주교는 포르투칼인이요,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원으로서 매우 박학하였으며, 중국 천주교가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 천주교인들로 하여금 의식에 관한 교황의 교서를 충실히 지키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 중 한 분이었다.
이승훈은 남당에 있는 성직자에게 세례 받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북당에 찾아가 그 곳에 있는 불란서 신부인 양 그라몽 신부에게 여러 가지 다짐을 받은 후 귀국 길에 오르기 전에 결국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그 때 북경에 있던 선교사 방따봉(Ventavon) 신부는 1784년 11월 25일(양력)부로 서양의 자기 친구에게 이 기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나는 그대가 한 사람의 입교 소식을 흐뭇한 마음으로 들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주께서는 아마 그로 하여금 아직 어떤 선교사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라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 동편에 있는 반도 조선입니다.
이 조선 사신들이 작년 말에 왔는데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을 주었습니다. 이들 양반중 한 분의 아들은 나이 27세인 박학한 사람으로 그 서적들을 열심히 얽어서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천주의 은총이 그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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