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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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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승훈.베드로-2 날짜 2004.07.12 12:44
글쓴이 관리자 조회 408
나는 그에게 성세를 주기 전에 많은 문제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진리를 명확히 아는 이 종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또 '복음이 가르치는 순결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더니, 그는 '법적인 아내 외엔 또 다른 여자를 결코 얻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출발하기 전에 그 아버지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양 그라몽(Grammont) 신부가 베드로란 본명으로 그에게 성세를 주었습니다. 그의 성은 이(李)가이며, 왕가의 인척이라 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 자기 구령(救靈)에만 전력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신들도 그들의 왕에게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도록 제의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북경에서 조선 서울까지는 욕로로 약 3개월 걸립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들과 각자의 글씨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글자와 중국 글자는 모양과 뜻이 같으며 다른 점이 있다하여도 아주 미미합니다. 그러나 발음은 전혀 다릅니다. 조선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글씨로 써 놓으면, 우리는 그 글자를 보고 뜻을 이해하였고, 그들도 우리가 대답으로 써놓은 것을 보고 그 뜻을 즉시 알아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잡진년(1784년) 봄에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몇 가지 이상한 물건들을 몰래 감추어 가지고 서울고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에게 그것들의 전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벽은 그동안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경성으로 들어와서 외딴 집을 세내어 들어앉았다. 이승훈에게서 받은 서적들을 통하여 그는 종교의 진리에 대한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철저한 반박과, 7성사의 해설과,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와, 그 날 그 날의 성인 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 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이 커가조,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주고자 하는 욕망이 커져만 갔다.
이벽은 얼마동안 그 서적들을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와 이승훈과 함께 정약전(丁若銓), 약용(若鏞) 형제를 찾아가,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서 구속(救贖)의 은혜를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열성으로 세워진 우리 천주교회는 이듬해인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만이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양으로 귀양가 2년 후 죽게 되었는데 이 일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이 을사년의 박해를 받게 되자, 이승훈도 그의 형 이치훈 등 가족들의 박해에 못 이기어 집안에 감금당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천주교 서적을 불태운 후 천주교를 물리친다는 벽이문(闢異文)을 쓰고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라고 강요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2년 후 다시 정씨 형제들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읽던 반촌(泮村)에서 천주교에 대한 토론을 했고, 그 후 권일신의 주도로 용문사에서 다시 교회 조직을 세우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받들며,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과 함께 자신을 신부라 일컬으면서 성사와 주일미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바로 가성직제도였다.
그 사이에 이승훈은 정조의 특명으로 1789년 33세 때에는 경기도 평택 현감이 되었으나, 공자 등을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년 후 벼슬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는 이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몇 해를 지내는 사이에, 1790년 이승훈과 권일신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 교회의 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이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하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이승훈은 다시 조상 제사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
한편 당시 조선 교회를 이끌어가던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로부터 가성직제를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이를 폐지하였으며, 윤유일 등을 그 곳에 보내어 정식의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 요청에 따라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내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정월에 조선에 들어와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숨어서 4천 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 을묘북악산사건에 연루되어 이승훈은 다시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을 갔다. 주 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다니면서 선교에 힘쓴 결과, 1800년에는 1만 명의 교우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그의 계조모이던 벽파(僻派)의 정순왕후 김씨가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 해 12월부터 교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년)에는 3백여 명의 교우를 죽이는 첫 번째의 큰 박해인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승훈도 잡히어 2월 9일 의금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2월 24일에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큰처남 정양종 등과 함께 마침내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이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으니, 그때 나이가 45세였다. 그의 시체는 며칠 후 자손들이 몰래 거두어 고향인 인천 만수리(長壽洞)에 묻었다.
또한 이승훈으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그의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는 1866년에 순교하였고, 증손 이연구와 이균구는 1871년에 순교하여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의 가계는 이 땅에서 지금까지도 신앙의 가계를 이어왔고 이승훈은 이 따의 신앙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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