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회원가입  |  로그인  |  사이트맵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일반자료실
일반자료실
제목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날짜 2003.01.07 13:21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8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우리 한국교회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103위 성인을 모시고 있다.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거행된 103위 성인의 시성식 이후에도 한국교회는 신앙 선조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비록 순교자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지라도 뛰어난 덕행을 남긴 신앙 선조들을 현양하고 그분들의 신심을 이어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땀의 순교자'라 일컫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꼽을 수 있다. 김대건 신부님에 이어 두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올해로 서품 150주년

최양업은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독실한 교우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나, 1861년 6월 15일 나이 마흔 하나에 경북 문경에서 사망하였다.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것은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에서 살던 1836년,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1837년 11월 동료 최방제를 잃었고, 현지의 민란으로 1839년에는 7개월 동안 필리핀의 마닐라와 롤롬보이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유학생활이 계속되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은 것은 1849년 4월 15일.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인 사제가 태어난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요동에서 생활하다가 1849년 12월 3일 마침내 귀국에 성공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꼭 13년 만이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를 왜 '땀의 순교자'라 하는가? 그것은 귀국 후 그의 사제생활 11년 6개월 동안 걸을 수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하다가 결국 과로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뒤 한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다녔습니다"(최양업 신부의 서한집).

최 신부의 사목활동은 귀국하기 전 요동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7개월 동안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주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는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할구역은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 좌 우도, 전라 좌 우도 등 5개 도에 걸쳐있었으며, 때로는 강원도 일부까지 순회하여야 했다.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그가 만난 신자수는 사목생활 첫해인 1850년에는 3천 8백여 명, 1852년에는 5천 9백여 명, 1857년에는 5천여 명으로, 이는 당시 전국의 신자수 35-50퍼센트에 해당할 만큼 높은 비율이었다. 또한 해마다 세례를 주어 입교시킨 어른 영세자 수는 1855년까지만 해도 전국 영세자의 절반이 될 만큼 높았으나, 선교사제 수가 많아지고 관할구역이 축소되면서 점점 낮아졌다.

쉼없이 이어진 교우촌 방문

당시 조선 교회의 성직자들은 박해 때문에 사목활동에 많은 제약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최양업 신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생활은 마카오의 유학 시절 스승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대로 "항상 사슬에 묶여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박해시기의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일치로써 극복하면서 자신의 사제적 소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림을 하느님을 위해서 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요 희망이시며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죽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교회 안에서 매우 긴밀한 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장상 주교들을 언제나 존경과 순명의 정신으로 대했고, 동료 사제들과도 친밀한 형제애를 나누었다. 또한 교우들과도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목자의 사랑을 베풀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인사를 하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준 뒤 교우촌을 떠날 때에는 여행할 옷차림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집 전체가 울음바다가 됩니다." 그는 교리 연구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한글을 알지 못해 기초적인 기도문이나 교리를 외우지 못하는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암송하기 쉬운 한글 기도문이나 교리서를 편찬하려고 애썼다는 점이 그의 여러 편지에서 드러난다.

최 신부는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으로 조선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며 또한 조선을 개화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성을 가지고 "만일 필요하다면 피를 흘릴" 각오를 가지고 교우촌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집행하던 구역에는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우리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마을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교활동의 과로로 장티푸스에 걸려 숨진 최양업 신부를 애석해 하는 베르뇌 주교의 애도사이다.

결코 길지 않은 최양업 신부의 사제생활은 한마디로 사목 순방에서 시작하여 사목 순방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삶은 당시 박해받고 있던 교우들에게 크나큰 증거가 되었으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 되고도 남는다.

#이 글은 지난 4월 17일 서울 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9년 7월호, 정리 김진복 편집장>

최양업신부와 베론성지
목록 쓰기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이용약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10번지 충무빌딩 313호    Tel:02-2269-2930    Fax:02-2269-2932    Email:wonjuse@hanmail.net
COPYRIGHT DOMA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