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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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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양업 신부 사향가 (1, 2) 날짜 2003.01.07 13:22
글쓴이 관리자 조회 700
최양업 신부 사향가 (1, 2)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소위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에서 현재 친저성이 인정되는 가사는 네 가지, 즉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사향가>이다. 이중 가장 많이 보급되고 애송되었던 가사는 <사향가>이며 필사되어 온 이본(異本)들도 다양하다. 이 중 <사향가>의 친저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또한 다양한 <사향가>의 이본들 중 어느 것이 원본의 모습에 가깝게 보존되어 왔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서정수 교수는 언어학적 분석에 따라 원문에 가까운 <사향가>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정본을 중심으로 사향가를 접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본다. 서정수 교수는 <사향가>를 6장으로 나누어 정리했는데, 우리도 그 가다듬기에 따라 가사를 살펴보려 한다.

1. 들머리: 본향은 천당

"본향은 어디"

(1) 어화 벗님네야1) (2) 우리본향 찾아가세
(3) 동서남북 사해팔방 (4) 어느곳이 본향인고
(5) 복지로 가자하니 (6) 모세성인 못들었고
(7) 지당으로 가자하니 (8) 아담원조 내쳤구나

해마다 명절이 되면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찾아 집을 나선다. 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동서남북 사해팔방"을 다 다녀도 인간은 끊임없이 고향을 찾고 그리워한다. 참된 고향을 발견하지 못해서 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참된 자리, 참된 고향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 <신명초행>의 "사람의 종향" 항목에서는 "사람이 향하는 곳은 사람을 내신 본의 자리"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래 자리는 세속의 쾌락과 영화가 아니라, 하느님 자리 즉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 안에 심어 주신 고유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창세 1, 26),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비록 인간이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 안에는 끊임없이 우러나오는 무언의 부르짖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않는다. 구약의 모세가 에집트를 탈출하여 40년간 광야를 헤매는 여정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상징한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에 들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선종한 모세(민수 20, 12 ; 신명 34, 4)는 구세사 안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시킨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계명 대신 지상의 탐스러운 열매들을 추구하는데(창세 3, 6), 이것은 본래의 고향을 찾지 않고 지상의 복지를 찾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낙원에 들지 못하고 지상에서 방황하고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되어 있다.

각자의 영혼 속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들이 찾아가야 할 고향이다. 그러므로 성 아우구스띠노는 <고백록> 1권 1장에서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역시 이런 고백을 할 것이다. "우리는 크옵신 당신의 성화 속에 안식하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은 아무런 선도 아쉽지 아니한 지선, 항상 고요하시니 고요함이 바로 당신이니이다"(13권 38장).


“덧없는 이 세상”

(9) 부귀영화 얻었던들 (10) 몇해까지 즐기오며
(11) 빈궁재화(마음에) 걸리인들2) (12) 몇해까지 근심하리
(13) 이렇듯한 풍진세계 (14) 안거할곳 아니로다
(15) 인간영복 다얻어도 (16) 죽어지면 헛것이오3)
(17) 세상고난 다받아도 (18) 죽어지면 없으리라.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세상의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귀 영화와 빈곤 근심, 인간의 영화로움과 세상의 고난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향락에 몸을 담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더니 그것 또한 헛된 일이었다”(전도서 2, 1)고 한다.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2, 23).

이러한 세상의 덧없음에 인간은 두 가지 삶의 자세를 가진다. 하나는 허무주의요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다. 전자는 세상에 태어난 고통과 비참함만을 보고 자신을 허물어뜨리며 물거품으로 만든다. 후자는 어차피 짧은 세상을 사는 동안이나 실컷 즐기고 영화를 누리려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삶의 태도는 한 쪽면만을 보기에 극단을 향하여 서로 만나게 된다. 그래서 허무와 쾌락은 이웃하며 서로의 담을 넘어들며 혼란스러움을 더하게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인생의 길이 요청된다.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큼 사람에게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보기에 물론 이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시는 것이다”(전도서 2, 24).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섭리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영화와 빈궁은 사라지나 하느님의 섭리와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하느님으로 비롯되지 않는 삶은 허무의 나락으로 사라지지만, 하느님을 토대로 지은 이승의 삶은 영원에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초행}의 “영원” 항목에 “세상에 있음은 덧덧함이 아니오. 이 잠간 생명을 지난 후에 영원 생명이 올 것이오”라고 말한다. 또한 “이 잠시를 주심은 영원을 위함이니……세상의 잠간 부귀와 일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 {사후묵상}의 “사후” 항목(1면)에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 헛되고 잠간 사는 세월에도 덕을 닦아 임종을 예비”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장자는 지락(至樂)편에서 ‘지극한 즐거움’에 대해 논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귀와 장수와 명예를 좋아하고, 빈곤과 요절과 치욕을 싫어한다. 즐거움을 찾고 괴로움을 피하는 이 행위(行爲)는 어리석은 일이다. 참된 즐거움은 "지락무락(至樂無樂) 지예무예(至譽無譽)"에 있다고 한다.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명예가 있으면 불명예가 있다. 즐거움을 찾지 않고 괴로움을 피하지 않는 무위(無爲)는 지극한 즐거움에 이른다. 무한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있으면서도 즐거움이 없는 것처럼, 괴로움이 있으면서도 괴로움이 없는 것처럼 사는 데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2고린 6, 10). 세속의 복락이 지극한 즐거움을 주지도 않고, 세상의 고난이 지극한 즐거움을 영영 빼앗지도 못한다. 참된 즐거움은 기쁨과 고통의 행위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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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정수 교수는 김덕민본을 참조하지 않았으므로 각주에서 그 차이점을 기록하고자 한다. 김덕민 본에는 "어화 우리"라고 되어있다.

2) 김덕민 본에는 ‘만타한들’로 되어 있다. 서정수 교정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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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린들’이라고 하였으나, 본 분 형태에 더 가깝게 하기 위해 ‘걸리인들’로 했다.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3) 김덕민 본에는 ‘죽어지면 고만이라’고 되어 있다.

회보 <배티 성지> 제2호 : 2000년 2월 15일 발행; 제3호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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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노래 2

최양업 신부 사향가 (3, 4)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본향은 천당"

(19) 우주간에 빗겨서서 (20) 조화묘리 살펴보니
(21) 체읍지곡 이아니며 (22) 찬류지소 이아니냐
(23) 아마도 우리낙토 (24) 천당밖에 다시없네
(25) 복락이 순전하고 (26) 길경이 충만하다
(27) 무궁세를 지내도록 (28) 영원상생 무종하니
(29) 우리인생 바랄 것이 (30) 이곳밖에 또있는가
(31) 천하만복 다받은들 (32) 천당복에 비길소냐
(33) 천하만고 다당한들 (34) 지옥영고 비할소냐

여기서 저자는 세상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보고 있다. 바로 코앞의 물체나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조하며 인간의 종말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 세상은 울고 넘는 박달재요 방랑하는 유배소다. 그러나 고통의 바다, 지식의 바다 가운데 바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미시적인 안목에 만족하게 된다. 감각적인 자극과 만족, 세상의 부귀영화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는 삶에 빠지게 된다. 우리들에게 불행과 울음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인생은 한낱 풀 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40, 6)고 하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몸매도 시간과 더불어 시드는 꽃이며, 아무리 거대한 부귀영화도 죽음 앞에서 사라지는 먼지에 불과하다. 유다 왕 히즈키야는 죽음을 앞두고 매우 슬프게 울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제비처럼 애타게 웁니다. 비둘기처럼 구슬프게 웁니다"(이사 38, 14). 이렇듯 자신의 종말을 앞둔 인간은 거대한 벽에 부딪히며 생명을 애원하게 된다. 그때 가서야 삶의 종말에 대한 거시적 안목이 열리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 제3편에서 어떤 이상한 나라의 풍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나라에서 자식을 낳으면 친우들이 그 집 문 앞에서 울면서 조문하고, 초상집에 가서는 풍악을 울린다고 한다. 그들에게 탄생은 '체읍지곡'과 '찬류세상'에 들어온 것이요, 죽음은 그 질곡을 벗어난 것이다. 사향가의 저자는 바로 이 이상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생의 종말을 잘 깨닫는 사람에게 죽음은 영원한 행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을 관조하는 사람에게 찰나의 행복은 오히려 슬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생의 종말은 영원한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왜 많은 사람이 죽음 앞에 무서워 떨며 몸부림을 치는가? 그 종말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누이처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텐데! 인간은 그 심연에서부터 지옥의 가능성과 존재에 대해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물 속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인간은 죽음의 현상을 수없이 접하면서도 생명의 역동성에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생에 대한 희망은 우주만물의 조화를 묵상하는 사람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천당 영복(永福)을 향한 순례자는 세상살이의 근심과 번뇌가 가벼운 짐이 된다. 세상의 온갖 고통은 행복으로 가는 한 과정에 불과하다. 사람의 머리가 하늘로 향하고 있듯이, 신앙인은 천당 본향(本鄕)을 향하고 그곳을 그리워한다.



2. 천당 가는 길

"세 가지 원수와 일곱 가지 도적"

(35) 갈길이야 있건마는 (36) 찾아가기 어렵도다
(37) 강성한 많은도적 (38) 여기저기 숨어있어
(39) 좁은길에 메복하니 (40) 편히가기 어렵도다
(41) 삼구는 밖을치고 (42) 칠도는 안을치니
(43) 이렇듯한 적수단신 (44) 어찌하여 이길소냐
(45) 이도적곧 못이기면 (46) 천당갈길 다시없네

천국에 이르는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 14)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천당 가는 길은 인간 내면과 외면의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좁은 길목에 매복해 있는 원수와 도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만나서 겨뤄야 할 상대이다.

삼구(三仇)라 하면 세 가지 원수, 즉 마귀·세속·육신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은 악의 세력, 세속적인 생활, 육신의 쾌락이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낯설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이러한 요소들이 영적인 세계에서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밝힌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정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또한 사도는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에페 2, 3)임을 지적하고 있다. 세 가지 원수는 특히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생기는 것이므로, <사향가>의 저자는 "삼구는 밖을 친다"고 강조한다.

일곱 가지 도적[七盜]은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를 말한다. 명나라 예부상서를 지냈던 정이위는 [칠극]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와 맞으면 좋아하고 자기와 맞지 않으면 싫어하는데, 그리하여 마음에서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교만·질투·탐욕·분노·욕심·방탕, 그리고 게으름이 되는데, 대강 세어 보면 일곱 가지가 된다."1) 이 일곱 가지 뿌리는 인간 내면에서 생명의 길을 흐리게 하여 사람을 미혹한다. 인간의 마음 밭에 숨어 있다 불쑥 불쑥 나오는 잡초처럼, 끊임없이 영혼 생명을 위협한다. 그

래서 "칠도는 안을 친다"고 한 것이다.
하늘 나라에 이르는 '좁은 문' 대신 '좁은 길'이라는 표현은 동양적인 사고 방식을 암시한다. 유교의 도(道)를 들어 깨닫고 완성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은 친숙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향가>가 지어진 시기에는 산 속의 좁은 길가에 숨어 있다가 사람을 공격하는 '도적'이 많았다는 사실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도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영적 생명의 약탈자를 잘 상징한다. '원수'라는 표현은 매우 강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만큼 경계해야 할 외부의 적이 공격해 온다는 영적 세계의 현실을 설명한다. 내부의 영적 도둑을 방어하고 외부의 영적 원수와 싸워 이기는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길을 싫어하지만, 그 길은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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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빤또하 지음, 박유리 역, {칠극}, 일조각, 1998, 1쪽.

회보 <배티 성지> 제4호 : 2000년 4월 15일 발행; 제5호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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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노래 3

최양업 신부 사향가 (5, 6)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세 가지 원수와 일곱 가지 도적" (계속)

(47) 싸우기를 두려워하여 (48) 도적에게 항복하면
(49) 천당영복 아주잃고 (50) 지옥영고 어찌할고
(51) 대부모를 못가보고 (52) 흉마중에 종이되어
(53) 억만세를 지나도록 (54) 맹화중에 잠기어서
(55) 만고만난 다받으며 (56) 절치통곡 무궁하다
(57) 대해수를 다퍼낸들 (58) 이고난을 면할소냐
(59) 대지사석 다헤낸들 (60) 이앙화를 벗을손가
(61) 무궁함도 무궁하다 (62) 지옥고의 영원이여1)
(63) 한번잘못 떨어지면 (64) 벗어날길 만무하다
(65) 천당지옥 분로할제 (66) 지척간에 비롯하니
(67) 그아니 두려우며 (68) 이아니 삼갈소냐

이 구절들은 지옥벌의 영원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영적 싸움에 패배한 자들이 겪을 결과를 잘 설명한다. 싸우기를 두려워하여 도적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교만·질투·탐욕·분노·욕심·방탕·게으름이 가득하여 진아(眞我)를 상실함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어 극기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영혼은 나태해지고 연약해져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 세속의 전쟁에 패배하여 적군의 포로와 노예가 되듯이, 영혼은 영신 전장에서도 패배하여 흉악한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최후 심판 장면을 묘사하면서 영생과 영벌에 대해 언급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25, 46). 심판 날 주님께서는 악인들에게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25, 41)고 명하신다. 참으로 두렵고 엄하신 선고이다. 죽음의 한 순간에 영원한 고통과 행복이 갈린다는 이 말은 단순 명료하다. 하지만 죽은 자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윤회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영벌에 대해 신자들에게 설명한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쫓겨나 영원히 멸망하는 벌을 받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2테살 1, 9).

성 뽈리까르뽀도 디오네또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원한 불에 던져질 사람들에게 마련된 진짜 죽음을 두려워하라”고 권고한다. 성 유스티노, 안티오키아의 데오필로 등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한결같이 지옥 불의 영원함에 대해 선언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마태오 복음 25장 46절을 해설하면서 “그것들은 서로 상관성을 갖는다. 즉, 영원한 생명이 있으면 영원한 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은 끝이 없고 영원한 벌은 끝이 있으리라고 말한다면 자가 당착이 된다”(신국론 21, 23). 1215년에 열린 4차 라데라노 공의회에서 이러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재차 확인하였다. “각자의 행실에 따라, 선이거나 악이거나, 악마와 함께 영원한 벌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영광을 받는다”(신조 모음집 801번).

이러한 전통을 따라 <사향가>의 저자는 억만 년이 지나도 끝이 없는, 큰 바다의 물을 다 퍼내도 사라지지 않는 영벌을 기억하도록 권고한다. 천당 영복은 대부모를 만나는 것으로 표현하고 지옥 영벌은 불로써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 같지만, 천당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1고린 13, 12)이다. 지옥 영벌은 묵시록에 그려진 것처럼 악인들이 악마와 함께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져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묵시 14, 10 ; 20, 10). 또 <사향가>에서는 “땅을 치며 통곡한다”는 마태오 복음 8장 12절을 “절치 통곡”이라고 읊고 있다. 이처럼 성서적인 표현을 짧은 가사의 형식 안에서 잘 소화하고 있다.

“가련한 세속의 삶”

(69) 어화 가련하다 (70) 세속사람 가련하다
(71) 대부모를 저버리고 (72) 본고향을 전혀잃네
(73) 원수를 섬기면서 (74) 군부같이 공경하네
(75) 이도적을 사랑하여 (76) 적자같이 보호하네
(77) 귀향소를 애탐하며 (78) 헛된낙을 사모하네
(79) 역려같은 이세상을 (80) 천만년을 경영한다

여기에서는 세속 사람의 특성을 몇 가지 나열하고 있다. 그는 대부모를 저버리고 본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세 가지 원수를 섬기고 일곱 가지 도적을 사랑하는 사람, 덧없는 이 세상을 헛되게 탐익하는 사람이다.

대부모는 유교 사회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중요한 호칭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진리를 위해 부모의 명을 거부하고 신주를 모시지 않았으므로, 부모를 섬기지 않는 패륜아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보다 더 위대한 천주를 모시고 효도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하는 호칭이 바로 대부모(大父母)인 것이다. 이 호칭은 신자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천주실의] 상권 제2편에 "천주는 부모보다 더 '큰 부모'(대부모)요 임금보다 더 '큰 임금'(대군)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지조는 같은 책의 재판 서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 섬길 줄은 알지만 천주가 대부모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정하상 성인은 <상재상서>에서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대군 대부모'가 어찌 상벌의 법도가 없겠습니까?"하고 반문하고 있다. {성교요리문답}의 "성체 문답"에서는 예수의 천주성을 설명하며 '참 주재 대부모'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렇게 대부모라는 호칭은 인류의 시조와 부모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인간은 부모에게 효도할 뿐 아니라 더 큰 부모에게도 효도하여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하느님께 효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속을 초월하여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세 가지 원수와 일곱 가지 도적이다. 이 주제는 <사향가>에 자주 등장한다. 세속 사람과 천주교인의 차이는 세 가지 원수와 일곱 가지 도적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육신·세속·마귀를 임금처럼 섬기고 공경하는 사람이 세속사람이다. 반면에 신앙인은 그것들과 영신 전쟁을 하며 싸운다. 또한 세속 사람은 교만·탐욕·방탕 같은 죄의 근원을 좋아하며 헛된 쾌락을 추구한다. 신앙인은 죄의 일곱 가지 근원에 대해 미워하고 뿌리채 뽑아낸다.

이 세상은 주막집(역려)에서 하루를 묵는 것과 같다. 천년의 세월을 눈앞에 두고 우리 인생을 생각한다면 잠깐 지나치는 일생은 참으로 덧없다. 그러나 이것을 세속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계획한다. <사향가>의 저자는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하느님께는 천년의 세월도 하룻밤과 같은데 우리 인생은 얼마나 덧없는 것일까?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읊고 있다.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옵니다."(시편 9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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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정수 교수는 "지옥영고 무궁하다" 로 교정하고 있으나, 다른 필사본에는 "지옥고의 영원이여" 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사향가의 언어학적 분석>, 539쪽 참조).



회보 <배티 성지> 제6호 : 2000년 6월 15일 발행; 제7호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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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노래 4

최양업 신부 사향가 (7, 8)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네 가지 종말"

(81) 영혼거둘 기한미쳐 (82) 죽을 병이 이르렀다
(83) 몸죽기를 두려워하여 (84) 두눈물을 흘리면서
(85) 처자를 영결하고 (86) 세상만물 다버린다
(87) 질곡영어 벗은후에 (88) 주대전에 나아가서
(89) 엄심판을 자세히받아 (90) 평생죄악 드러나네
(91) 대부모를 영결하고 (92) 흉마중에 떨어져서
(93) 천당진복 영실하고 (94) 지옥불의 섭이되어
(95) 삼사오관 죄악대로 (96) 실고각고 다받으니
(97) 억만년이 지나도록 (98) 절치통곡 뿐이로다
(99) 천만고초 다받으니 (100) 죽었다고 뉘이르며
(101) 안위할곳 없어지니 (102) 살았다고 이를손가
(103) 죽도않고 살도않고 (104) 무궁세에 이러하니
(105) 그 아니 가련하며 (106) 이 아니 불상한가
(107) 우리무리 봉교인도 (108) 죄과보속 못다하면
(109) 엄심판을 받은후에 (110) 연옥불에 들어가서
(111) 죄과보속 다한후에 (112) 천당문에 오르거든
(113) 하물며 세속사람 (114) 영고지옥 오죽하랴

인간이 맞이하는 네 가지 종말은 죽음·심판·천당·지옥이다. 전통적으로 사말(四末)이라고 하는 이것들을 윤형중 신부는 {천주교 상해 요리} 95-110 문답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향가>에서는 81항부터 90항까지 죽음과 심판을, 91항부터 106항까지 지옥의 모습을, 107항에서 112항까지 연옥과 천당을 묘사한다. 특히, 세속 사람의 '영고지옥'에 대해 강조하며 가련한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신앙의 선조들은 스스로를 '봉교인'이라 부르면서 세속 사람과 구별하려 했다.

죽은 후 각자의 행실에 따라 상과 벌을 받는다는 것은 천주교의 기초 교리이다. 이를 언급하면서 <사향가>의 저자는 죄를 짓는 영혼의 구체적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삼사오관'의 죄악대로 심판과 벌을 받는다. 삼사(三司)는 기억(memoria), 지성(intellectus), 욕구(appetitus)를 말하고, 오관(五管)은 귀, 눈, 입, 코, 팔다리를 말한다. 이는 19세기에 영혼 존재에 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천주교인 사이에 잘 알려져 있음을 뜻한다. 프란치스코 삼비아시(畢方濟, 1582∼1649)는 1624년 {영언려작}에서 영혼론을 개진하여 서양 철학을 동양에 소개하였다. 이 영혼 사상은 18세기 초엽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후일 권철신과 같은 남인계 학자들은 영혼 존재에 대해 눈을 뜨고 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의 진리를 인식하고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 영혼의 기억은 감각적 기억과 이성적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보이거나 경험한 사물을 기억하는 것이고, 후자는 보이지 않고 보편적인 사물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게 되는 것은 감각적 기억의 효과이다. 또한 사람의 피부가 황색이고 소의 털이 황색일 때, '두 가지가 모두 황색이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사물이고 이성적 기억으로 파악된다. 무형의 사물에 대한 기억은 죽은 뒤에도 사람의 영혼에게 남아 있다. 영혼이 실고(失苦)와 각고(覺苦)를 받는 것도 이성적 기억으로 인한 것, 즉 무한한 행복을 잃었다는 것과 악행에 따른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인간의 영혼은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가령 흰색의 물체를 파악할 때, 능동적 지성이 감각 기관을 통해 흰색의 초상을 지어내면, 수동적 지성은 빛을 비추어 흰색을 보게 하는 것과 같다. 이 수동적 빛이 천주를 알아보게 하는 진리의 빛이다. 인간의 욕구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본성적 욕구와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욕구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적 욕구로 나눌 수 있다. 의롭고 아름다운 선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 욕구이다.

인간의 영혼은 다섯 가지 감각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세속적인 가치를 알려고 하고 그 쾌락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영혼 안에는 그러한 기억이 잠재되어 있어 영혼의 근본 가치 이해와 상충하게 된다. 이로써 영혼은 방황하게 되고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하게 된다. 영혼은 진리를 깨닫고 추구할 때 영혼 안에 기억된 스스로의 빛으로 하느님께 인도되고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 <사향가>의 저자는 사말의 심판을 논하면서 영혼 삼사와 오관이 심판과 영벌의 전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천당가는 싸움”

(115) 어화 벗님네야 (116) 우리고향 가사이다
(117) 가기는 가려니와 (118) 그저가기 어렵도다
(119) 깊고험한 세해중에 (120) 홀몸으로 가잔말인가
(121) 멀고높은 천당길에 (122) 빈손으로 가잔말인가
(123) 저도적을 쳐이기면 (124) 고향가기 쉬우리라
(125) 힘을쓰고 꾀를내어 (126) 한사(限死)하고 싸워보세

김덕민 본 <사향가>에는 115행의 '벗님'이 '교우'로, 116행의 '고향'이 '본향'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 교우들은 본래의 고향을 찾아가는 신앙의 벗들이다. <천주공경가>의 첫머리에는 "어와 세상 벗님네야"라며 교우 아닌 세상의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시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벗이라고 부르신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요한 15,15).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듣고 깨달은 이들은 주님 안에서 친한 벗이 된다. "깊고 험한 세상의 바다"를 헤치고 천당 길에 오른 도반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에바프로디도를 자신의 동료요 전우라고 말한다(필립 2,25).

이 세상은 영신의 전장 터이다. <성경직해>에서는 이 세상을 공전지세(攻戰之世)라 한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사도는 에페소서 6장 10절 이하에서 영적 투쟁에 대해 설명한다.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 6,13). 사도는 영적 싸움에 걸맞는 무기와 갑옷을 갖추도록 권고한다. 영적 싸움에서 진리는 허리띠로, 정의는 가슴막이로, 믿음은 방패로, 구원의 희망은 투구(1테살 5,7)로,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은 칼로, 자양분은 기도로 비유된다. 신앙인은 믿음의 싸움에 임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1디모 6,12). 그것은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월계관이다(2디모 4,8).

오리게네스는 {순교권면} 4장에서 "조롱받고 박해받는 자들에게 마련된 커다란 상급을 현세의 전쟁 동안 기억하라"고 말한다. 또한 33장에서는 벨의 사제들과 큰 뱀을 대항하여 싸운 것을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한다(다니엘 14장 참조). 사자굴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처럼 신앙인들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신앙인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위해 싸운다(필립 1,30).

믿음의 싸움에 임하는 자는 폭력과 미움 대신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해야 한다(1디모 6,11). 세상 한가운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태 10,16)고 당부하신다. 사랑과 온유로 힘을 쓰고 영적인 지혜와 슬기로 신전(神戰)에 임해야 한다.

"멀고 높은 천당 길"은 '승리의 월계관'을 향해(1테살 2,19) 달음질해야 함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 3,14). 신앙인은 하느님의 넓고 길며 높고 깊은 신비의 길을 가는 것이다(에페 3,18).







회보 <배티 성지> 제8호 : 2000년 8월 15일 발행; 제9호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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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노래 5

최양업 신부 사향가 (9, 10)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군비 갖춤"

(127) 어찌하여 잘싸우며 (128) 어찌하면 이길손가
(129) 태공병법 쓰지 말며 (130) 손자진법 하지말며
(131) 다위성왕 본을보며 (132) 오주예수 표를삼세
(133) 고난으로 전장삼아 (134) 고공(苦功)으로 성을쌓고
(135) 십계로 장대삼고 (136) 지덕으로 문을내고
(137) 의덕으로 정병삼고 (138) 겸덕으로 기병삼고
(139) 묵상으로 병서삼고 (140) 성경으로 방패삼고
(141) 절덕으로 기(旗)를삼고 (142) 용덕으로 말을삼고
(143) 신덕으로 선봉삼고 (144) 망덕으로 복병삼고
(145) 고상으로 절부(節斧)삼고 (146) 십자가로 창검삼세

<사향가>의 저자는 영신 전쟁터에서 사용할 군비를 나열한다. 태공 병법과 손자 진법은 세속적이고 폭력적인 전쟁에 사용할 기술과 지략을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서에 나오는 영적 싸움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윗 성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든다.

다윗 왕은 세속적인 전쟁을 잘하여 유다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번영케 한 임금이지만, 성서는 그 왕의 내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대해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선택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사무 상 16,7). 다윗은 사면의 원수를 다 평정하여 마음놓고 살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 드렸다. "야훼 나의 주님, 제가 무엇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런 자리에까지 끌어 올려 주셨습니까?……고마운 마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야훼 나의 주님께서는 종 다윗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개만도 못한 이 종을 돌보시어 이처럼 크신 일을 하심으로써 소인을 알려지도록 하셨습니다"(사무 하 7,18-21). 이렇게 그는 겸손하고 야훼께 믿음을 둔 성왕이었다.

구세주 예수께 대한 초점은 십자가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죽음이 어리석고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1고린 1,23), 하느님의 사랑에 믿음을 두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승리의 표본이다.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난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세속의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냄새와 아우성 속에 이루어지지만 영신 전쟁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기는 고난과 박해 속에 이루어진다.

인고의 공덕을 쌓고 마음을 굳게 다져 영적인 성을 만든다. 천주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영적인 병사가 따라야 할 기본이다. 이것을 교회 지도자는 높이 서서 크게 알린다. 향주삼덕과 사추덕(virtutes cardinales)은 군비의 기본이다. 전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대신덕(對神德, virtus theologica)이고, 후자는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네 가지의 기본 윤리덕(virtus moralis)이다.

십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지휘 방침이라면 병사들이 갖추어야 할 군비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덕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은 인생의 목적인 하느님을 향한다(S. Th. 2-2, q.4, 7c).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는 것이기에(로마 5, 2-5) 윤리덕을 앞선다. 영신 전쟁터에서 신덕은 맨 앞에서 나서고, 망덕은 복병처럼 영원한 생명을 숨어 기다린다. 어떤 필사본에서는 애덕에 대한 언급이 137행의 의덕 대신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덕은 영신 전쟁의 정예 부대인 것이다.

희랍 철학에서 말하는 윤리덕은 네 가지 기본 덕이 있는데, 그것은 지덕·의덕·용덕·절덕이다. 이 덕들은 다른 모든 윤리덕을 포괄하는 덕이다. 그래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영신 전쟁의 무기이다.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한 문은 지혜의 덕이 있어야 열린다. 의로움의 덕은 공명 정대하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정병이다. 신앙의 군사는 말처럼 용맹하게 나아가고 절제로 깃발을 세운다. 이 밖에 겸덕은 기병처럼 싸움의 토대를 마련한다. 신앙의 군사는 십자 고상으로 모든 사단을 끊어내고, 영신의 창검인 십자가로 원수를 굴복시킨다. 성경을 방패삼아 나쁜 길을 피하고 바른 길을 맛들이며 묵상으로 영신 싸움의 지략을 꾀한다.



“군비 갖춤” (계속)

(147) 전비를 다갖추고 (148) 진법을 차린후에
(149) 칠대를 정제하고 (150) 팔장을 선택하여
(151) 교오적이 나오거든 (152) 겸양대로 방어하고
(153) 간린적이 나오거든 (154) 시사대로 방어하고
(155) 사음적이 나오거든 (156) 정결대로 방어하고
(157) 분노적이 나오거든 (158) 함인대로 방어하고
(159) 탐도적이 나오거든 (160) 담박대로 방어하고
(161) 질투적이 나오거든 (162) 인애대로 방어하고
(163) 해태적이 나오거든 (164) 흔근대로 방어하고

빤또하(J. Pantoja, 龐迪我)는 {칠극}(七克)이라는 책에서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 길은 복오(伏傲), 평투(平妬), 해탐(解貪), 식분(熄忿), 색도(塞 ), 방음(防淫), 책태(策怠)이다. 다시 말해 교만을 누르고, 질투를 가라앉히고, 탐욕을 해소하고, 분노를 식히고, 식도락을 절제하고, 음란함을 막고, 게으름을 채찍질하는 길이 곧 죄의 근원을 극복하는 길이다.

명나라 예부상서를 지냈던 정이위(鄭以偉)는 {칠극}의 서문에서 극기(克己)는 주정(主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헛된 생각을 제거하고 사욕을 이겨내는 것이며, 여기에서 '극'은 적을 이기는 것이라고 한다. 왕여순은 {칠극}의 후기에서 '극'에 대한 논의는 공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일곱 가지 사욕의 길을 번갈아 공격하여 자신을 지키고 적에게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빤또하는 칠죄종(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es)을 극복하는 길을 유교의 수양 방법과 연결시킴으로써 완덕(完德)으로 나아가는 칠극(七克)의 길로 설명하였다. 더 나아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욕과의 싸움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내적 투쟁의 구체적인 전개는 놀랍게도 <사향가> 안에서 일곱 개의 방어대[七臺]와 여덟 가지 장수[八將]라는 용어로 정립되었다. 교오적(驕傲賊), 간린적( 吝賊, 인색함), 사음적(邪淫賊), 분노적(忿怒賊), 탐도적(貪 賊), 질투적(嫉妬賊), 해태적(懈怠賊, 게으름)을 방어하기 위해 겸양, 자선, 정결, 인내(含忍), 마음의 깨끗함(淡泊), 자애, 근면의 덕을 쌓는다. 이토록 치밀한 논리 전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칠극}의 내용을 묵상한 결과로 보여진다. {칠극}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 때부터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이 {칠극}에 정통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이 최양업 신부에게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오만은 죄의 시작"(집회 10, 13)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교만이 죄의 우두머리이고, 모든 선덕을 다 없애 버린다"고 말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교만한 자는 잠깐 사이에 벼락치듯 빨리 떨어진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루가 1, 51-52). 질투는 교만의 벗이다. 질투는 남을 자기보다 낮게 보고 시기한다. 플라톤은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천 개의 눈과 귀를 주어 모든 사람의 덕과 복을 보고 듣게 하고 싶다고 하였다. 성 그레고리오는 "남을 질투하는 이들은 남이 지혜롭기 때문에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고, 남이 즐겁기 때문에 자신을 근심스럽게 만든다"고 하였다. 질투는 남을 사랑할 때 없어진다.

빤또하 신부는 세상 사람들이 인색함이라는 수레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이것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이다."(1디모 6, 10). 자선을 베푸는 이는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된다. 성 그레고리오는 "분노는 모든 악의 문이다"라고 말한다. 집회서의 저자는 이렇게 권고한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네 처지가 불쌍하게 되더라도 참고 견디어라."(집회 2, 4).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음식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절도에 맞게 먹고 마시는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짓을 하는 자와 탐욕을 부리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상속을 받지 못한다"(에페 5, 5). 빤또하 신부는 "음욕은 마귀의 큰 그물이며, 세상 사람들은 거의 그 그물에 걸려 있다"고 이해하였다. 또한 동정 부부로 살았던 한 선비의 깨끗함을 보고 더러운 마귀가 피해 도망간 이야기를 {칠극}의 방음(防淫) 편에서 전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한국 천주교회의 동정 부부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게으른 자는 둔하고 힘이 빠진 말과 같아 채찍질을 받아야 한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지혜를 깨쳐야"(잠언 6, 6) 한다. 성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것처럼, 음란이라는 수레는 일이 뜻대로 되고 재물이 넉넉한 것을 두 마리의 말로 삼고, 게으름과 일시적인 편안함을 두 명의 종으로 부린다.

<사향가>의 저자는 겸손과 자선, 정결과 인내, 절제와 사랑 그리고 근면의 덕행을 쌓아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일곱 가지의 덕행은 완덕에 이르는 길에서 한 길로 빠지지 않는 방어벽이 된다.





회보 <배티 성지> 제10호 : 2000년 10월 15일 발행; 제11호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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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노래 6

최양업 신부 사향가 (11, 12)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군비 갖춤" (계속)

(165) 물화진을 만나거든 (166) 신빈자로 저당하고
(167) 흉포진을 만나거든 (168) 양선자로 저당하고
(169) 희소진을 만나거든 (170) 체읍자로 저당하고
(171) 탐린진을 만나거든 (172) 기의자로 저당하고
(173) 빈핍진을 만나거든 (174) 애긍자로 저당하고
(175) 우환진을 만나거든 (176) 심정자로 저당하고
(177) 쟁투진을 만나거든 (178) 화목자로 저당하고
(179) 표한진을 만나거든 (180) 감수자로 저당하고

<사향가>의 저자는 영적인 싸움 도중에 나타나는 여덟 가지 진영(陣營)을 나열한다. 그것은 물화진(物貨陣), 흉포진(凶暴陣), 희소진(戱笑陣), 탐린진(貪 陣), 빈핍진(貧乏陣), 우환진(憂患陣), 쟁투진(爭鬪陣), 표한진(慓悍陣)이다. 이러한 진영에 맞서 싸우는 군사들은 진복 팔단의 장수들이다. 즉, 신빈자(神貧者), 양선자(良善者), 체읍자(涕泣者), 기의자(嗜義者)1), 애긍자(哀矜者), 심정자(心淨者), 화목자(和睦者), 감수자(甘受者)2)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에서 설교하실 때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다(마태 5, 3-10). 이로써 신앙인에게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대헌장이 제시된다. <사향가>의 저자는 이 말씀을 아주 깊이 묵상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면서 재물의 유혹이 포진하고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써야 할 군사는 '영적인 가난'이다. 박해의 상황에서 선조들은 세상의 재물과 전답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신빈(神貧)의 승리이다. 재미 삼아 치는 화투에서도 단돈 100원이나 1,000원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아까워한다. 우리 마음 깊이 돈이나 재물에 대한 애착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어떤 젊은 청년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그분을 따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가진 재산이 많아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다(마태 19, 16-29).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군사들 중의 하나는 재물이다. 좀먹거나 녹슬지 않는 재물을 하늘에 쌓는 일이다(마태 6, 19-20).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재물에 대해 자유로운 무소유의 정신, 즉 영적 청빈의 군사들이 양성되어야 한다. 이 점을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사향가>의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삶에 있어 누구나 경험하고 아파하는 현상은 오해와 모함, 그리고 폭력이다. 그것은 반드시 미움과 증오, 복수의 악순환을 동반한다. 누구나 그 마음속에 이러한 종류의 상처가 있어 괴로워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 29). 몹시 흉악하고 사나운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온유함에 있다. 신앙의 선조들은 양선자(良善者)가 되어 사나운 이리 떼와 같은 박해자의 공격을 이겨냈다.

천주학을 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시대에서 신자들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만고의 진리를 발견하고 따르는 길에 많은 비웃음과 눈물이 있었다. 박해자들은 그들을 비웃었고, 가족들은 눈물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회유했다. 또한 자신의 죄악을 아파하고 구원의 성사를 받지 못하는 슬픔도 있었다. 그러나 그 체읍의 고통은 하늘의 상급과 위로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역시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이, 자신의 결점과 죄악에 대한 아픔과 눈물이 당연히 있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는 징표이다. '체읍자'는 '희소진'을 만나 맞서 싸우게 된다.

사람의 굶주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옳은 일에 굶주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로움을 즐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재물, 세상의 명예나 영광에 굶주리는 것이다. 후자는 거의 대다수 거짓과 악행에 굶주리게 되어 있다. 이것을 <사향가>의 저자는 '탐린진'이라고 한다. 우리는 '기의자'로 맞서 나쁜 욕심과 싸워야 한다.

애긍 즉 자선을 베푸는 것은 많은 경우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동병상련의 정신으로 서로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빈곤한 자들이 더욱 이기적이고 인색해질 수도 있다. 길에서 죽은 가난한 거지가 억대의 재산을 감추어 두었다는 이야기는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곤궁과 핍박 가운데서도 우리는 자선을 행하고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 박해 시대의 곤궁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선조들은 자선 사업에 힘썼다. '빈핍진'은 '애긍자'로 맞서 싸워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심과 걱정, 재난과 병은 마음을 혼탁하게 한다. 믿음이 흔들리고 헛된 것에 안식처를 찾으려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이는 그 모든 것의 원인과 의미를 깨닫고 평정을 얻는다. 하느님을 만나 뵐 마음의 순수함으로 우환은 극복된다. '우환진'은 '심정자'로 대적하여야 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사색 당파의 싸움 중에 진정한 평화의 길을 믿음 안에서 발견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충돌,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 집단과 집단 사이의 분쟁은 십자가 상에서 바치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화해되고 평화를 이루게 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화목자'이다. 그 평화의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다. 모욕과 박해와 비난이 따르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사나운 박해를 만나 감수하는 이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그러기에 <사향가>의 저자는 "표한진을 만나거든 감수자로 저당하라"고 권고한다.


“영신 전투와 은총”

(181) 밤낮으로 싸우다가 (182) 달없는때 만나거든
(183) 신애긍을 횃불삼고 (184) 형애긍을 등불삼아
(185) 형세대로 싸우다가 (186) 근력이 부족하거든
(187) 주대전에 끓어빌어 (188) 천조신성 청병하라
(189) 부청성우 힘입어서 (190) 구원병이 나려오면
(191) 싸우기도 수월하고 (192) 이기기도 쉬우리라
(193) 중력으로 합세하여 (194) 이도적을 물린후에
(195) 좁은길을 다행하니 (196) 천당문이 거기로다

영신 싸움은 치열하여 밤과 낮의 구별이 없다. 특히 밤이 되면 하느님의 군사는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낭떠러지에 떨어질까 돌에 채여 넘어질까 조심스레 걸어야 한다. 악의 세력은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루가 4, 13 참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걸어본 사람은 달빛의 고마움을 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 고민할 때, 유혹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아찔해질 때, 판단이 정지되는 적막의 어둔 밤에 있을 때, 우리는 하늘의 비추임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무에 휩싸여 있을 때, 성령의 횃불과 등불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감각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 것을 포기하는 데서 오던 어두움은 어떤 종류의 신적인 밝음으로 바뀐다." 3)

애긍(자선)의 종류는 14가지이다. 정신적인 자선인 신애긍(神哀矜) 7가지와 물질적인 자선인 형애긍(形哀矜) 7가지이다. 신애긍은 잘못한 이를 훈계함, 몽매한 이를 가르침, 환난 당하는 이를 위로함, 근심하는 이를 돌봄, 남의 결점에 대해 관대함, 모욕에 초연함, 원수를 사랑함이다. 형애긍은 주린 이를 먹임, 목마른 이를 마시게 함, 헐벗은 이를 입힘, 병든 이와 갇힌 이를 돌봄, 나그네를 재워 줌, 사로잡힌 이를 속량함, 죽은 이를 장사지내 줌이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깨어 있는 행위이고 성령의 불을 지피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두르고 등불을 켜 놓고" (루가 12, 35) 신앙인은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힘겨운 영신 전쟁에 임한다.

사랑의 실천이 버거울 때, 신애긍의 횃불과 형애긍의 등불이 깜박거릴 때,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 주 대전에 무릎 꿇고 하늘 조정의 원병인 천신과 성인들이 함께 하시도록 주님께 간구한다. 하느님 아버지께 청한 도움(父請聖祐)은 헛되지 않고 영적 싸움에 승리하여 천당 문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향가>의 저자는 도움의 은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은총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상존 은총(Gratia habitualis)이고, 다른 하나는 조력 은총(Gratia actualis)이다. 앞의 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머물러 있는 생명의 은총이다. 뒤의 것은 인간 행위의 어느 시점에서 지능과 의지를 조명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는 은총이다. 이 조력 은총을 성우(聖祐)라고도 한다. 인생의 험난한 길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기진한 우리에게 내려진다. 우리가 기도 중에 그것을 포착하고 수용할 때, 우리의 영혼은 치료되고 승화되어 새로운 영적 기력을 받게 된다. 그 힘으로 좁고 험한 길을 지나 천당 문에 이르게 됨을 <사향가>의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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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동욱 본을 대본으로 삼은 하성래 교수는 기아자(饑餓者)로 보고 있으나 기의자(嗜義者)가 타당하다. <사향가>의 저자는 '의로움에 굶주린 이'라는 표현을 동양적으로 이해했다. 즉, 의로움을 찾아 즐기는 사람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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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성래 교수는 감수자(甘受者) 대신 군난자(窘難者)로 본다. 그러나 사나움(慓悍)을 만나 감수함으로 싸우는 것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3) 가브리엘 O.C.D., {사랑과 관상}, 부산 까르멜 수도원 옮김, CCK, 147.

회보 <배티 성지> 제12호 : 2000년 12월 15일 발행; 제13호 2001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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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노래 7

최양업 신부 사향가 (13, 14)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3. 참도리와 세속

"참도리와 세속"

(197) 어화 가련하다 (198) 세속사람 가련하다
(199) 요행으로 만민중에 (200) 참도리를 들었어도
(201) 막는것이 습속이요 (202) 법받는게 체면이라
(203) 허영잡낙 모든 것이 (204) 영혼눈을 가리우네
(205) 어찌하여 회심하며 (206) 어찌하여 귀정할까
(207) 진실한 이도리를 (208) 깊이알고 밝히알면
(209) 헛된세속 돌아보며 (210) 잠깐일락 탐할손가
(211) 허황할손 세속이라 (212) 훌훌할손 영욕이라

황사영(1775∼1801) 순교자는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그의 출중함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어전에서 친견의 은혜를 입었고, 정조 임금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미래의 벼슬과 부귀영화를 보장하였다. 그래서 황사영은 당시의 관습대로 국왕의 손이 닿았던 손을 비단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처숙들인 정약종, 정약용 등으로부터 서학과 교리를 익히면서 참된 도리가 천주교 안에 있음을 확신하며 입교하였다. 회심하여 천주교 신앙에 귀정한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대과에 나가지 않았으며, 신앙 생활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주학을 시작한 다음 해에 나라에서 금령을 강화하니, 친척과 친구들이 천주교를 물리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良藥)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

"참도리를 들었어도 막는 것이 습속이요 법받는게 체면이라"는 <사향가>의 구절대로 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의 뿌리가 내리지 않는 사람들은 천주교를 버리게 되었다. 황사영 순교자는 진리에 의해 비추임을 받았던 분이다. 그 눈앞을 가리었던 세속의 욕심과 영화를 벗어 버리지 않았다면 장래가 보장되었던 그가 어떻게 신앙을 견지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의 부귀영화가 잠깐 사이에 지나가고 훌훌 날아가 버리는 연기와 같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진사의 체면과 당대의 기득권을 버릴 수 있었겠는가? 황사영 순교자는 27세의 나이에 능지처참되고 그의 가족은 귀양가 노비의 생활을 하게 된다. 천주교 진리에 대한 그의 간절한 목마름과 확신은 세속의 허황함을 뛰어넘어 만대에 웅변하고 있다.

또한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1759∼1791)도 천주교가 진리임을 확신을 갖고 전했다. 군수는 윤지충 순교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에 관해서 아주 중대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것이 근거 있는 말이냐? 네가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 사실이냐?" 이 말에 그는 대답하였다. "저는 결코 이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는 다시 물었다. "그래, 그것이 이단이 아니란 말이냐?" 그는 명확히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 길입니다." <사향가>의 구절처럼 윤지충 순교자는 "진실한 이 도리를 깊이 알고 밝히 알아" 참도리에 회심했고 그것을 용맹스럽게 증거했다.

두 분의 순교자는 우리에게 세속의 허황함을 넘어서는 신앙의 깊이를 재어 보도록 초대한다. 또한 그분들은 신앙의 확신과 긍지를 갖고 이웃에게 진리를 증거하도록 요청한다.

“조명된 영혼”

(213) 만일에 천주성신 (214) 제성특은 드리우사
(215) 신광으로 비추시고 (216) 영혼눈을 여시면
(217) 참도리를 밝히알고 (218) 헛된영화 깨달으면
(219) 천당복락 안바라며 (220) 지옥영화 안피할까
(221) 육신세속 미워하고 (222) 영혼일만 닦으리라
(223) 부귀영화 부러워말라 (224) 이 아니 두려우며
(225) 빈궁고난 서러워말라 (226) 이 아니 다행하냐
(227) 천주사정 넓리알고 (228) 사말귀정 자세히알면
(229) 일락함을 다피하고 (230) 고난함을 구하리라

참진리로 인도된 영혼은 세속의 부귀영화가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전도 1, 2-3).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깨달은 사람은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빈궁고난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최필공 순교자(1745∼1801)는 중인 계급 출신으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세례 후 영혼 구원의 일만을 생각하여 세상사에 대해서는 필요한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이 참된 도리를 군중들에게 외치기도 하였다. "천지의 큰 임금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
1791년 신해박해로 형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께서 참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심을 증언하였다. 최필공 토마스의 순수한 신앙을 전해들은 정조 임금은 그를 회유하도록 지시하였다. 관리들은 그가 임금의 명에 순종한 것처럼 거짓 보고 했고, 그 결과 임금은 최필공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장가도 들게 해주었다. 그러나 최필공은 비록 거짓일지라고 배교의 대가로 얻은 세속적 복락에 대해 슬퍼하고 회개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성교를 준행하였다. 그 결과 1801년 2월 신유박해 때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사말, 즉 죽음과 심판, 천당과 지옥의 도리를 알고 깨달은 최필공은 세상의 일락을 피하고 고난을 구하며 죽음으로 천주를 증거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한 줄기 태양 빛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비추시며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비들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신적인 경지로 승화된다. 이것을 <사향가>의 저자는 성령께서 "신광으로 비추시고 영혼눈을 여신다"고 표현한다.
유학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선조들은 신앙의 진리를 참된 도리(道理)로 인식했다

. 그 중의 한 분인 이벽 선조는 {성교요지}에서 사람은 마땅히 정도를 구하여 배워야 함을 설명한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이치를 살피며 도(道)가 원근에 골고루 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호호광대하시며 그 덕화의 빛이 심원숭엄하시다." 사람은 "삼가고 삼가 국궁공경하면 어둡고 캄캄한 마음을 서서히 깨치게" 된다.
꾸준한 묵상과 공부로 천주교를 참도리로 깨달은 이벽 선조는 문중의 회유와 박해 가운데서도 굽히지 않고 <영득경신기>라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성령께서 그 영혼을 이끄시어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게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유교의 도리(道理)가 천주교의 교리(敎理)로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영혼 일만 닦았던 구도자"이었다.





회보 <배티 성지> 제14호 : 2001년 2월 15일 발행; 제15호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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