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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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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최경환 날짜 2003.01.07 13:29
글쓴이 관리자 조회 397
성 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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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경 환(프란치스코 1804-1839)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군 다랫골에서 살던 부자집 6 남매중 막내로 태어나서 일찌기 천주교가 전래되던 때에 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천주교 계명을 지켰다.

일명 치훈이라고 하는 최경환은 자라서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마리아)와 결혼하여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 중 한분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신부이시다. 그러므로 이 분에 대한 생애와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상세한 자료 는 그의 맏아들인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많이 남아 있다. 뿐만 아 니라 아들인 최 베드로, 며느리인 이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원래 성격이 사나웠던 최경환은 게명을 잘 지켜나가면서 차차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 최경환이 살던 다랫골 샛터는 산간벽지 로 교회소식에 어둡고 또한 수계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교우들이 사는 서울로 이사하기를 가족들에게 여러번 권했다. 그러나 그 지 방에는 몇몇 친척외에는 모두 외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만일의 때를 걱정하여 그 가족 및 친척들에게 거듭 권하여 보았으 나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아무 말도 없이 하직편지 한장을 남겨 놓고 집을 뛰쳐나갔다. 이 편지를 보고 온 집안이 크나큰 충격을 받아 집안사람을 보내어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경환은 집을 나간 것과 다시 돌아온 것으로 인하 여 집안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구령을 위하여 더 쉽게 일할 수 있도록 다랫골을 떠나자고 친척들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집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몇 달 안되어 그 고을을 떠나갔다.

최씨네 집안은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 러나 그리로 옮겨 오자마자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외교인이 경환을 거스려 여러번 송사를 걸었다. 그는 모두 패소하여 얼마 안되는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부유하고 유력한 몇몇 친구들이 도와줄 터이니 상소해서 상대자를 이겨 보라고 하였으나 그는, "악 으로 악을 갚으면 아니된다"고 하며 사양하였다.

이리하여 경환은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처 음에는 강원도 금성으로 가서 살았고 그 뒤에는 부평군 전편리로 마지막에는 과천고을 수리산 뒤뜸이라는 산골로 옮겨 살게 되었 다.

이리하여 최경환은 수리산 뒤뜸이 마을에서 회장이 되었다. 묵 상과 독서에 잠겨 열렬한 사랑과 놀랄만한 종교지식을 얻고 어느 때 어느곳에나 천주교와 신덕에 관한 이야기만 하게되니 모든 사 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먼 곳으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는 특히 천주께 대한 사랑과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모든 사 람의 마음속에 깊이 넣어주었다. 어느 날 고양군에 있던 땅을 팔 아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길가에서 빚진 돈문제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음을 보고 이를 말리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의 돈을 모두 빚준 사람에게 주어서 서로 화목하게 한 일이 있었다.

때마침 큰 홍수가 나서 농부들이 큰 걱정을 하고 있음을 보고 그는 "모든 일이 천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자비로우신 아버 지의 섭리를 믿고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구제에 힘썼다.

또한 경환은 무엇보다도 자비심에 가득찬 사람이었다. 헐벗은 사람만 보면 입은 옷을 벗어서 입혔다. 장에 가면 좋지 못한 물건 을 샀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경환은 "좋지못한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사람들이 어찌 되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한편 그 집안에 있어서도 때를 정하여 모든 식구가 같이 신공을 드렸다.

최경환은 1839년 그 마을의 전교회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때마 침 기해년 박해가 일어나 세상이 뒤집히고 흉년으로 굶주림이 온 나라에 휩쓸게 되니 그는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큰 돈을 모아 옥중 에 있던 교우와 허덕이던 외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공과책이외의 모든 성교에 대한 물 건을 숨겨 두고 때 오기를 기다렸다. 또한 치명자들의 시체를 거 두어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해 7월 31일 밤중에 서울로부터 보내진 포교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집대문을 부수고 달려들게 되었다. 이미 눈치를 챈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마치 친한 친구처럼 즐거운 낯으로 맞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늦었소?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아직 밤중이니 좀 쉬어서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 그 동안에 우리는 모두 모여서 갈 준비를 하오리다"라고 말하니 포교들은 그를 틀림 없이 천주교신자라고 믿고 안심하고 쿨쿨 코를 골게 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그는 마을의 교우를 찾아다니면서 '이번의 박 해는 성교의 씨조차 없애버리자는 작정이니 우리들은 다같이 나아 가서 치명합시다"라고 전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에게 "너희들 은 여기남아 있어도 죽은 것이니 굶주려 죽느니보다는 서울의 옥 중에서 죽으면 훌륭한 치명자가 될 것 아니냐"라고 말하며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사이에 그의 아내 마리아는 먹을 것을 마련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려 포교들에게 먹이고, 특히 그중 누더기옷을 입고 있던 포교 한명에게는 알맞은 옷을 내준 후 40명쯤되는 온 마을 교우들이 줄 을 지어 즐거운 낯으로 그곳을 떠나 서울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 다.

최경환은 그 아들과 다른 남교우와 같이 맨앞에 서서 길을 안내 하고 그 다음에는 여교우와 젖먹이 아이들이 따르며 맨뒤에서 포 교들이 채찍질하면서 따르게 되었다. 날씨가 더운데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이들은 아우성을 치고 길가의 구경꾼들은 온갖 욕을 퍼부었고 있었으나 경환은 큰 소리로 "용기를 내라, 형제들이여, 천신의 저울대는 그들의 발걸음을 헤아리고 있다. 보아라, 오주 예 수 그리스도께서 일지기 갈바리아의 산으로 올라가시던 것을!"하고 외치면서 그들을 격려하였다.

이리하여 30리쯤 걸어가서 일행은 조반을 먹고 이어 남대문을 거쳐 서울의 큰 거리로 들어서게 되니 사방으로부터 "야, 저봐라, 악착스런 놈들, 어린애들까지도 죽음터로 데리고 가는구나"하는 소 리가 빗발치듯 들려왔다. 이러한 광경속에 그 날 늦게야 그 일행 은 포청의 옥으로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에는 여러가지의 형구를 늘어놓은 포도대장의 앞으로 불려 나가게 되었다.

포도대장이 우선 최경환에게 "너는 정말 교를 믿으려거든 이 사 람들을 꼬이지 말고 너혼자만 할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니, 그는 "네, 누구든지 천주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는 지옥으로 떨어짐이 틀림없소이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러한 운명에 빠질 사람들 을 불쌍히 여겨서이고, 천주를 섬기고 저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서이외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판관은 최경환에게 두차례의 주리형을 주게 하고 꼬챙이로 살을 찌르며 배교하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하라고 명하였다. 여 기서 형리는 곧 경환의 옷의 일부를 벗기고 잔악한 형벌을 주게 되니 피는 흘러 내를 이루고 살은 흩어져 떨어지며 흰 뼈가 나타 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괴로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판관은 다른 교우들을 불러 내어 교를 버리라고 큰 소리치면서 곤장대로 열번씩 때리게 하니 그들은 배교한다고 말하 고 석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 많은 교우중에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있던 교우는 경환과 그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그의 친척이던 여교우 이 에메렌 시아 등 3명뿐이었다. 이를 본 경환은 그들의 비겁한 것을 슬퍼하 여 마지 않았다.

판관들은 경환의 한 아들이 외국으로 유학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분개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배교시켜보겠다고 서두 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판관에 대하여 "만일 당신들이 나를 보고 먹지 말고 살라고 명하면 그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오나, 천주를 버리는 것은 절대로 못할 일이외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형리는 그의 다리와 팔을 닥치는대로 마구 때려서 그 뼈가 튀어 나오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두달동안이나 옥중형벌에서 정강이의 매질을 340대, 볼기의 매질을 110대나 맞게 되었으나 그 래도 그는 죽을 때까지 기구와 교리의 강론을 그치지 않았다.

최경환이 이와같이 끝까지 굽히지 않음을 보고 형리는 그가 갇 힌 옥중에서 사나운 강도 한명을 같이 있게 하여 그를 욕하고 발 길로 차서 못견디게 하였으나 경환은 꼭 입을 다물고 이를 잘 참 고 있음으로 본 그 강도는 도리어 그의 인내에 감탄하여 천주교를 예찬하게 되었다.

하루는 옥리가 교회책을 그에게 내어주면서 이를 읽어 보라고 말하니 다 죽어가던 그는 벌떡 일어나서 모든 괴로움을 잊은 듯이 그 책을 줄줄 읽어 설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 다.

또 어느 날에는 앵베르 주교의 금관과 제복을 갖다 주면서 이것 들을 입어 보라고 말하니 그는 이를 굳이 물리쳤다. 이때 옥리가 그것을 외교인 죄수의 몸에 입히게 되니 그는 공손히 엎디어 십자 가에 절을 하였다. 일하여 9월 11일에 경환은 마지막으로 포도대 장앞에 불려나가 치도곤 50대의 볼기매를 맞고 옥으로 돌아와서 기진맥진 하여 말하기를 "목숨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목을 잘리고 자 한 것이 나의 일생의 바침이었으나 이대로 옥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바라신다면 그 뜻대로 되어지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경 환은 다음날 9월 12일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그 마지막의 숨길을 옥중에서 거두게 되었다. 3일후에 그의 둘째아들 베드로는 몇명의 교우들과 같이 그 시체를 찾아가 애우개에 묻었다가 그 해 가을에 는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이러한 경환의 모범된 신덕은 그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우리나라의 두번째의 신부로 되게 하였고, 그 자신도 성인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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