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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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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변문의 오후(1) 날짜 2015.06.08 16:50
글쓴이 관리자 조회 259

변문의 오후

…아…안…돼….

“안돼, 건아!”

‘퍼~억! 푸석.’

개울의 얼음이 깨져버렸다. 깨지지 않은 부분을 잡고 나오려 할수록 더 함몰되어 버린다.

“악, 안 돼 대건아!”

쑤욱, 간신히 버티던 손마저 얼음속으로 서서히 떠내려간다.

“안 돼, 김대건! 안 돼!”

맨주먹으로 죄 얼음을 깨서라도 꺼내야 한다. 그런데 내 발, 아까부터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발바닥, 양업은 있는 힘을 다해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우두둑 무릎이 빠지는 소리.

‘우리 대건이 큰일 났다.’ 아무래도 저 양관의 냇가 같았다. 늘 하던 대로 대건은 ‘업아, 얼음치기할 장소를 보고 온다.’하며 앞장섰는데 동짓달 그 단단한 것이 내려앉을 줄이야. 게 눈 감추듯 통째로 삼켜버렸다. 투명한 속으로 떠내려가는데 옴짝달싹도 못하는 내 발,

“사람 살려요!”

양업은 외마디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생시보다 더 생생한 꿈이라더니 휴우, 놀란 가슴이 여태 뛰다 무릎 쪽으로 옮겨가는 뻐근함을 느끼고서야 대건을 위해 기도할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에 젖은 몸이 이불 속에서도 썰렁하게 움츠러든다. 소팔가자의 가을은 빨리 오는데 9월만 넘어서면 서늘했다.

‘혹시 대건에게 일이 생긴 것이까?’

두 귀는 늘 조선 방향으로 세워져 살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고달픈 산하의 소식이라도 들어볼까 해서이다.

여기 소팔가자의 중국 교우들이 허물없이 대해준다 해도 뭐랄까 잠시의 위로요, 본 시합을 앞두고 있는 연습만 같았다. 그러고 보면 파리 외방 신부들은 대단도 했다. 내일 임지를 뜨더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머문다.’는 것, 양업은 이 점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앞서 가신 부모와 뒤를 쫓고 있을 형제들을 생각하면 소팔가자가 돌연 도망지로만 여겨졌다.

‘가서 겨레를 위로해야 한다. 순교자들의 곁을 밝혀야 한다. 돌아가 같이 울고 웃어야 한다.’

“최 부제, 잠을 못 잔 모양이래요?”

식탁에서 소팔가자 본당 전 신부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왜?’라고까지는 묻지 않는다.

“이제 조석으론 쌀쌀하지?”

날씨 얘기로 대신 받는 메스트르 신부도 양업의 기색부터 살폈다.

“헌데…좋은 아침이 아닌 것 같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요.”

“조선 이야기지?”

“대건 신부였는데 글쎄 무슨 일이 있나….”

“아요!괜찮아, 그래봤자 꿈 아니래요?”

소팔가자 본당신부는 한족이었다. 근방 수천 리를 가도 이런 다국적 생활도 없을 것이 중국인 프랑스인 조선인이 한 지붕 밑에서 하나의 보편교회 시간표로 살고 있었다. 가끔 독립하고도 싶지만 공동체로 산다는 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모른다는 메스트르 신부의 말마따나 방금 전만 해도 서로를 챙기질 않았나. 이럴 때는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는 선배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 같았다.

“조선 생각하면 나도 가시방석이야!”

메스트르 신부도 조선 이야기면 만사가 뒷전이었는데 소팔가자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잠정적이다. 소속은 조선교구다. 지난겨울만 해도 조선 입국로를 찾아보겠다고 직접 훈춘까지 갔었다. 결국 자기 탓에 허사가 되었다며 소팔가자에 돌아와서도 몇 달째 기운이 없더니 찬바람이 돌기 시작해서야 예전의 모습이 나왔다.

“최 부제, 여기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니야?”

“그게… 그렇지요?”

메스트르 신부와 양업과의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 차이가 있다. 선배이자 감독관 같은데도 솔직한 심사를 먼저 털어놓ㄴㄴ 것은 비단 조선인인 데다 부모 모두 피 흘린 집의 자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언급하려면 제자의 얼굴부터 살피게 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11월 중순까지만 있자고,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어?”

“저야 고마울 분이지요!”

둘이 나누는 대화에 소팔가자 본당신부가 끼어들었다.

“오메 이게 무슨 소리래요? 우리 소팔가자가 뭐 섭섭하게 해준게 있드래요!”

“허, 신부님이 너무 잘해줘서 빨리 떠야겠네요.”

“아요! 그러지 마시래요.”

전 신부는 순박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꼭 양업의 어린 지지자 징징을 닮았다. 객을 위하는 도가 넘쳐 어떤 때는 민망할 지경인데 양말짝 하나가 들어와도 모았다가 똑같이 나눴다.

“메스트르 신부님, 최 부제, 만약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 있으면 이야기하드래요.”

“우짜시게?”

“그냥 콱, 손금 봐주게. 여긴 그래도 내 관할 아니래요?”

“내가 보기엔 여기 사람들… 본당신부님보다 최 부제를 좋아할 걸?”

“그래요? 그거는 좀…별론데.”

하! 하! 하! 양업도 따라 웃었다. 뒷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듯 싶다.

“아니 딱 한 명 있지, 우리 못살게 구는 사람!”

메스트르 신부는 장난스럽게 전 신부를 바라본다.

“누구래요, 그기?”

“지금 나랑 이야기하는 사람.”

“아요! 내가 언제?”

“감사합니다, 전 신부님. 최 부제와도 늘 얘기하는 게, 신학교 입학하고 여기가 제일 편안타고, 그래도 최 부제, 이번 가을엔 움직이자고!”

양업을 돌아보는 메스트르 신부의 말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했어도 벌써 기별을 했을 대건 신부인데 사정이 있나 봐요. 11월까지 없으면 우리끼리라도….”

“그래, 그러자구!”

“아요! 가지 말드래요.”

“최 부제님!”

범 요한이었다. 따로 받는 급여는 없지만 작년 봄부터 학생식당에서 세 끼를 먹고 약간의 용돈을 받는 것으로 사환고용에 정식 합의했다. 무엇보다 사제의 길에 대한 미련으로 신학교 주변을 못 떠나는 것 같았다. 이십 대 후반인데 아직까지 미혼이었다.

“요한 씨가 웬일로, 밤이 깊었는데?”

“잠이 안 와서예!”

“잠이 왜 안 오실까?”

“가을도 왔고 옆구리도 시리고….”

“에이, 가을이라 그러면 내 옆구리는 안 시린가?”

“그기 다르다카이? 신학교 나오게 된 이유를 이젠 알 거 같심더! 혼자 있는 시간이 안 가는 거라카이. 그래 혼자 시간 잘 보내는 분들 보만, ‘역시 저런 데서 다르구나.’싶지예.”

“대개… 혼자 있을 때 뭐하는데요?”

“재밋거리가 문제라요. 그거 찾다 보만 술 생각도 나고 이것저것 잡다한 상상에, 고해성사 거리 만들기 십상이라 카이끼네예!”

“그렇구나, 혼자 있는 것 어려우면 성직 생활은 좀 그런데….”

“부제님은 뭐 아무 문제 없잖심니꺼?”

“저는 뭐, 괜찮아요.”

“하긴 주님과 함께하시니 심심치도 않겠심더 뭐!”

“그렇게 쌍뚜스는 아니지만…, 5년 전 마카오에서 대건 신부도 에리곤 호로 출항했고 다 떠나고, 몇 달 동안 작은 방에 정말 외톨이였는데… 지낼 만하드라고요, 오히려 예수님이 잘해주시던데?”

“부럽다 부러버.”

“며칠 전 신독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신독(愼獨) 삼갈 신 자에 홀로 독 자?”

범 요한은 얼른 말부터 끈어 들어가는 자신을 본다. 아무리 의젓해도 어디까지 외국인 아닌가, 중국 고서에 관한 한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몸을 삼가고 더 조심한다는 거.”

“캬… 그거 좋은 말이지예!”

독한 백주라도 마시듯 인상을 쓰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표정이란 알면서도 안 된다고 대문짝만 하게 써놓은 꼴이었다. 범 요한의 생각에도 이 신독이란 말은 정결하게 살았다 싶으면 하늘 높게 당당하다가 또 그렇지 못하다 싶으면 눈도 잘 못 뜨는 자기 부류에게 꼭 필요한 말이라고 여겨졌다.

“그래 그게 그렇겠네예.”

범 요한이 물끄러미 양업을 보다가는 정결이야말로 으스대라는 게 아니라 누구맨치로 ‘제대로 사랑하기 위한 기초요 가난해도 누추해지지 않는 소양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게…우리랑도 통하는 거 같아요.”

“예수님하고 공자님하고 말입니꺼?”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깨어있으라 하셨잖아요?”

“우리 부제님, 이제 동서양을 막 왔다 갔다 카시네!”

“조선도 사서삼경 있다구요.”

범 요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안면근육의 신경선 하나가 살짝 떨리다 만 것 같다.

“근데예 부제님! 고마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겠네예?”

“고마 모르겠으면 말든지….”

양업은 부러 장난기를 발동했다.

“저기….”

“저기 어디?”

“홍홍 마리아 말입니다.”

“네…에….”

양업의 장난기가 일순간 수그러들었다. 목소리는 모기만 하게 기어들고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사실 어제 홍홍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홍홍 마리아는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소팔가자 성당의 아가씨인데 얌전하고 용모가 단정해 많은 청년들이 좋아하고 있었다. 청년 성가대 부단장을 맡고부터는 단원들이 두 배나 늘었다니 분명 젯밥에 가있는 마음들도 있을 터다.

정작 홍홍은 양업을 좋아했다. 양업도 이렇게 저렇게 뭔가 다른 공기는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저 꼬마 숙녀들이 부제님 좋아하는 쯤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편지 속에는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 여인으로서의 감정도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들었는지 ‘부제님과 저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처럼 평생 순결한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이가 되었으면 해요.’라고도 쓰여있었다. 양업은 솔직히 피식 웃고 말았다. ‘쬐그만 녀석으로 알았는데 뭐라, 어쩌구 저쩌구?’

하기는 행동이 워낙 애늙은이 같아 그렇지 나이 차야 여섯 살 정도이니 여자 쪽에선 모종의 대상으로 여길 만도 했다. 편지지에는 여름내 주워 말렸을 네 잎 토끼풀과 향내 나는 분홍 꽃잎들이 보기 좋게 붙여져 있었다.

“홍홍이가 최 부제님 억수로 좋아하는 것 같던데예?”

“에이… 그러면? 세상에 누가 나를 싫어하겠어?”

잠시 기어들어 갔던 장난기를 발동하려다 양업은 지레 멋쩍은지 손사래를 쳐보였다.

“최 부제님은 좋겠어예? 지도 홍홍이 좋거든예….”

“이런 엉큼이!”

“내가 도둑놈이지예, 나이 차가 여덟 살인데.”

“도둑 제 발 저리고 있구나.”

“부제님 눈엔 아 이쁨니꺼?”

“이쁘지요, 우리 성당 목단화인데?”

“그런 애가 좋아한다고 하면 부제님은 진짜 괘안슴니꺼?”

“감사하지요, 볼품없는 저를 하늘의 부제라 좋아해 준다니.”

“솔직히….”

범 요한의 눈빛이 갑자기 음흉해졌다.

“손이라도 한번 잡고 싶은 생각 안 들어예?”

“손? 손 잡고 싶지요. 바로 기도 손으로 모아주게. 하!하!”

“우리끼리… 그런 고리타분한 말은 말고예.”

“누가 날 좋아한다면 싫진 않지요. 그 인간적인 감정마저 위에 계신 분께 올려드릴 기회니, 그만큼 공동체가 사랑 차지 않겠어요?”

“홍홍이 억수로 이쁘던데….”

“난, 여자들 제일 예쁠 때가… 미사 때 성체를 받아먹는 모습이더라. 홍홍이 영성체하는 모습도 밉진 않지.”

“저는 말임니더, 홍홍이가 멀리 보여도 고마 얼음이 됩니더, 가슴은 두근대고 여름에도 안 덥고 겨울에도 안 춥어예!”

“오, 사랑의 위대함이여.”

“부제님 진짜 손목도 안 잡고 싶어예?”

“에이 참, 내가 내 손을 뭣하러 잡고 싶겠어요? 성체성사 모시면 거룩하게 한 몸인데, 그게 그러면? 내가 내 손 잡는 거지.”

“아하!”

“이런 마음은 들지요. 든든함 같은 거, 세사엥서 우리 편이 확장되는구나, 어깨동무 같이 가자!”

“그러시구나.”

“아무튼 홍홍이 마리아, 날 좋아단다니 이번에 확실히 그리스도 사람으로 올려드려야 할 텐데.”

“부제님? 홍홍이 마리아… 내 사람으론 어떻게 안 되겠슴니꺼?”

“연분이 있으면 뭐, 그전에 요한 씨 술부터 끊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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