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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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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무의 아침-변문의 오후(2) 날짜 2015.06.08 16:51
글쓴이 관리자 조회 219

“와아, 미사곡 대단했어!”

“고음부의 정신적 지주 덕분 아니겠어?”

“홍홍인 듣기에 어땠어?”

일요일 저녁미사는 청년미사였다. 한 동아리의 청년들이 미사를 끝내고 마당에 모여 방금 불렀던 미사곡에 대해 자화자찬 중이다. 그래도 밉지 않을 것이 이 젊음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양업도 부제 복사를 마치고 나왔다.

“부제님이다, 오늘 성가 어땠어요?”

“점점 물오르는데, 저 상해 성당보다 나은 것 같아.”

“진짜요? 와!”

말만 한 처녀들이 낡은 수단 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양업은 주춤해야 했다.

“그럼 우리 고구마 사주세요.”

“부제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은 청년들과의 은어였다. 용서를 베풀어 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른바 공금이 아닌 ‘자기 부담 비용’으로서의 ‘자비’로 통하고 있다.

“부제가 무슨 돈이 있니?”

“에요, 가난뱅이 우리 부제님!”

일제히 혀를 차는 표정들은 그래도 정월 대보름달이다.

“내일 본당신부님한테 말씀드려 어떻게 해볼게…. 다음 주 고구마 회식 있도록 기도나 해라!”

“네!”

이때쯤 되면 당연히 부단장인 홍홍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오늘 막 입단한 신입들도 챙기고 수고했다는 둥, 나름대로 그녀의 목소리가 나야 할 때다. 그러나 아까부터 뒷전에 빠져 양업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손짓과 눈짓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라들일 기세로 그러고 있었다.

실은 양업도 아까부터 그쪽이 간지럽다는 생각을 했다. 바늘 구멍 뚫린 문창호지로 들어오는 광선처럼 직사해 오기 때문이다. 일부러 홍홍에게 말을 걸었다.

“참, 마리아 부단장!”

“….”

홍홍은 담당 부제의 말을 삼켜버린다.

“마리아도 본당신부님한테 고구마 사달라고 해봐, 동시 협공하자!”

“….”

주변 청년들은 눈치태지 못할 것이다. 며칠 전 마리아가 양업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후로 국맥이 다 되었다는 것을…. 그러나 멀찍이서 광경을 지켜보는 범 요한에겐 모든 사정이 손바닥 들여다보이듯 했다.

“참, 오늘 고음 누구야, 잘 올라가던데?”

양업은 일부러 바로 화제를 돌린다.

“리나, 감기 다 나았어?”

그러다 리나를 본다. 양업은 여교우들 대하는 법을 알 것도 같았다. 이미 성숙한 여인이나 다름없을 것이 그녀의 편지에서도 여실했지 않은가. 남교우들은 좀 덜하다. 그러나 여교우들, 특별히 예쁜 여교우를 대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그런 쪽만 오래 보고 이야기하면 판이 깨지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가령 3초 쳐다 보았다면 그렇지 못한 쪽은 곱절을 보아야 한다. 의식적으로라도 그래야 한다. 홍홍은 지금 청년들 사이에 최고의 미모였다. 전체의 활력을 위해 일부러 그녀를 중심에 넣지 않는 것이다, 넣지 뫃하는 것이다. 그러는 척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고, 남자든 여자든 성직자에게 내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다져오던 차였다. 이런 속을 갓 스무 살 된 홍홍이 헤아릴 리 없고 부제님이 쌀쌀맞아지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지금 홍홍은 이 정도 가지고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부제님이 편하시다면 자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부제님…뭐하세요?”

양업은 요 며칠 성당 정원수에 가을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잘 드는 낫으로 수형(數型)을 다듬고 있는데 지난 일요일 저녁 때 보이고 안 보이던 홍홍이 나타났다.

“뭐하시냐니까요?”

“안 가르쳐 주지.”

“치이… 나무 전지하세요?”

“응.”

“부제님, 제 편지…."

금시 얼굴을 붉힌다. 왜 홍홍이라 했는지 알 만할 전형적인 사과형 얼굴, 조금이라도 수줍으렴 귓불까지 발그레진다. 뒷머리를 곱게 땋아서 한족으로 늘어뜨린 것이 누가 뭐래도 다 큰 쳐녀였다. 소팔가자에선 있는 집 딸이라 새 옷차림에 막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을 굴리며 붉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섰다.

“잘 읽었어.”

“….”

“너 문장력 좋더라!”

“….”

“우리 홍홍이 이다음에 누가 데려갈라나 복 터졌어.”

“치이, 잘난 체하기는!”

“아니 요녀석이, 부제님이 원래 좀 잘났기로서니, 그리도 못마땅하단 말이냐?”

“웬 이 도령 말투?”

“마리아야.”

“….”

홍홍은 지금 통제불능이었다. 부제님이 묻는데 몇 번이나 묵묵부답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전에는 없던 일이다.

실은 홍홍 역시 잘 몰랐다. 다 자란 몸이지만 응석도 부릴 겸 그렇게 먼저 마음을 보인 것이 쑥스러워 입을 봉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녀로 볼 때는 열다섯 살 때부터 짝사랑해 온 사람이기도 했다. 불공평하기만 한 것, 불공평해서 더 애잔한 그것. 그러나 아무리 손해나는 사랑이라도 기꺼울 것 같은 분이었다. 하늘을 사는 데만 푹 빠져 손을 내밀어 어찌해 보기에는 하늘 쪽에 드리운 데가 너무 많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끌렸고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정작 마주하기만 해도 어디선지 훅, 차오르는 것이 있어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육감이랄까, 어쩐지 이번 가을이 마지막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난데없는 느낌이었다. 성장기 시절 온 저녁을 사로잡다 새벽빛으로까지 비춰오셨던 사람, 이분이 영영 떠날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도 했었다. ‘나는 하느님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부제님의 하느님이 얼마나 달콤 멋지신지, 최 부제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좋으심을 본다.’ 그런 양업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왜일까.

사실은… 어차피 떠나야 할 분이셨다. 이분 없이도 물론 지낼 수 는 있다,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 계셨던 자리만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벌써부터 퀭, 아파오는 가슴은 견딜 수 있겠지만 밑으로 꺼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로 가라앉을 때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부제님, 나 이젠 꼬마 아니란 말예요!”

순간 뜨거운 기운이 처녀의 앞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한창 부풀어 오를 여인의 그것이었지만 그래도… 양업은 여전히 애늙은이 같은 눈빛을 유지하고 있다.

“음… 마리아야.”

그 어른스러움을 보자 홍홍은 더 갈증이 났다. 솔직히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고 아주 많이 하늘게 죄스럽지만 한 번이라도 와락 껴안았으면 소원이 없었다.

양업은 낫을 쥐지 않은 손으로 볼썽사납게 웃자란 향나무 가지를 잡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동시에 당겨 단번에 잘라내었다.

“마리아.”

“….”

“나무 전지 왜 하는 줄 알아?”

“….”

“자를 것은 과감히 잘라내야 틀이 잡히는 거야.”

“….”

“사람 마음이란 것도 자를 때는 잘라야 제대로 자라는 거고….”

“….”

“얘가 아주 내 말은 대꾸도 않는구나!”

“부제님.”

“왜?”

“부제님!”

“와아?”

“우리 소팔가자에 오래 오래 계셔야 해요!”

“갑자기 아닌 밤에 홍두깨야?”

“나 부제님 안 계시면 성당 안 나올 거야!”

“얘가,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벌 받아, 내가 무슨 금송아지 우상이냐?”

“아무튼! 하여튼! 좌우간! 어쨌든! 오래 오래 계셔야 해요!”

“글세… 홍홍이 시집가는 건 봐야겠지.”

멀리서 두 사람을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범 요한이었다. 그 거리에서도 홍홍의 가슴에서부터 파장되어 나간 편린들이 감지되어 유독 그의 눈에는 ‘저것들 풋사랑이 아닌데.’만 싶다. 두 눈이 부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질투가 엄습해 오면 모든 것이 마비되는 것일까. 그나마 유일하게 대화가 되는 벗이었는데 그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여인과 필시 뭔가가 있는 듯싶다.

실은 얼마 전 양업 부제에게만큼은 쭉 호의적이었던 천 요셉이 돌연 “최 부제와 홍홍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냐?”하면서 비릿하게 굴던 적은 있었다. 녀석이야 원래 그런 놈이려니 하고 무시하던 차였는데, 며칠 전엔 지가 먼저 술을 산다며 또 두 사람 얘기로 약을 올려댔다. 최 부제와 나빠지면 득 볼 것이라도 있는 놈처럼 노골적인 데가 있어서 ‘뭐라카노?’하면서 넘어가던 중이었다. 문제는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 홍홍과 양업 사이에 있는 저 공기, 그것들이 내면을 들쑤셔왔다.

“아이, 저 문디들이?”

라고 말해버렸다. 홍홍의 눈빛 하나가 크게 확대되어 보였고 손짓 하나가 멀리서도 쥐고 흔들었다. 양업의 의젓함마저 허울 좋은 가식으로만 보이니 뭔가 씐 것이 분명했다. ‘내가 와 이카노?’하는데도 불길은 그나마 남은 것들마저 활활 살라버린다. 네편 아니면 내 편으로만 갈라 중간에 바늘 하나 꽂을 여지없이 편협해진다. 오로지 내것 아니면 네 것이라는 소유욕만 으르렁거렸다.

신학교 출신인 범 요한도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질투 관계를 알고 있다. 다윗과 사울, 두 사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맞수다. 본래 훌륭한 왕이었던 사울의 문제는 맞수가 생겼다는 것. 지나가는 노랫말 “사울은 수천 명을 치셨는데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하나가 그야말로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다윗을 죽이려고 나섰던 자신을 두고 울부짖지 않았는가. “아들 같은 다윗아, 도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느냐?”

어차피 인생에 맞수란 게 필요할지 모른다. 달리기할 때도 나란히 뛰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판정은 심판의 그것을 기다려야 할 뿐 선수가 판정까지 뛰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판정은 심판의 그것을 기다려야 할 뿐 선수가 판정까지 하려 들 때 사울의 월권을 범할 것이다. 다윗의 경우는 내 어찌 기름부음 받은 이를 손댈 수 있느냐?“며 선수 노릇만을 고수했다.

범 요한은 계속 신학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살다 보면 이런저런 맞수가 있다. 다른 사람에겐 신경도 쓰이지 않는데 그가 그러면 즉시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그럴 때가 질투마귀의 시간일 것이니 이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자꾸 옆 선수 보지 말고 위를 보아야 한다. ‘다 아실 심판관께서 판정해 주십시오.’라고 맡기는 게 분수에 맞다.

신학생 때 이 강론을 들으면서 따로 적어놓기까지 했던 범 요한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는 대로 안 된다는 거였다. 머릿속이 텅 빈 장승처럼 서있기만 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수상했고 사소한 동작마저 부정해 보였다. 그런 중에도 세포 하나가 꿈틀댔으니 홍홍의 손짓 몸짓이 탐스러워 아예 소유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미우면서도 끌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눈알만 벌게진다. 모든 것이 소유욕, 나의 너로 만들려는 유혹임을 모르지 않았다. 문젠 알면서도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땐 누가 건들기만 해도 불똥이 그리로 튈 것이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홍홍에게도, 계속 나무만 자르는 양업에게도 분통이 터졌다.

‘최양업, 함 두고 보자!’

왕툰에서의 일도 잊고 소팔가자에서의 유일한 벗을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몇 마디 나누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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