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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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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변문의 오후(6) 날짜 2015.06.08 16:58
글쓴이 관리자 조회 353

“최 부제 나… 아무래도… 속이… 이상한데….”

“어, 진짜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점심 먹은 게… 탈이 났나 봐!”

하마당을 출발해 두 시간 되었을까, 계속되는 오르막이었다. 고향 청양의 어른들이 먼 길을 다녀오고 하신 문경새재 얘기가 떠올랐다. 가도 가도 오르막이요 산이라 했는데 지금 연산관 길이 꼭 그랬다. 왜 연산관이라고 했는지 몇 번을 되새기게 하는 커다란 재였다. 대평원에 익숙해진 두 사람은 걸음걸음이 힘겨웠다. 설상가상으로 메스트르 신부마저 탈이 났으니 겨우 달래가던 가난에 대한 서글픔까지 겹쳐 동짓달 칼바람으로 엄습해 왔다. 돈 없어 배칼까지라니, 이런 심정은 굳이 십자가로밖에 달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괴어오르는 걱정은 길이 지체되다 산중에서 밤을 맞는 것이다. 이런 산세에다 야간이라면 없는 맹수가 없을 터였다.

메스트르 신부의 얼굴은 흙빛이 다 되었다. 설사와 구토가 끊이질 않는다. 처음엔 음식물만 나오더니 검누른 물에 벌건 피도 섞여 나왔다. 그래도 부들부들 일어서는 정신력이 놀라울 뿐이다.

“신부님 제 등에 업히시지요!”

“안 돼, 자네 봇짐은 어떡하고?”

양업은 획 보따리를 앞으로 돌렸다.

“짠!”

부러 등을 구부리며 광대처럼 입을 찢어 보였다.

“최 부제 웃기지 마, 지금 배 아프단 말야!”

“자 어서요!”

“무거울 텐데….”

환자의 짐까지 둘러멘 폭이었다. 눈 쌓인 얼음 위를 밟을 때면 어헛하며 고꾸라지기가 일쑤였다. 이러다간 밤을 새도 연산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최 부제, 어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기왕 기다릴 거 가고 싶던 데나 가자 했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으려고 걸었대. 그런데 걸음이 살아나고 있더래. 그런데 걸음이 살아나고 있더래, 불치병도 걸어서 치료했대!”

내려줘. 아파도 걸어볼래. 자꾸 넘어지는 것보단 빠르겠지, 하면서 거의 뛰다시피 양업의 등에서 내려왔다. 끊어지는 배를 움켜쥐고 비실비실 걷기는 하지만 평소보다 몇 곱이 더디었다. 절반도 오르지 못했는데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산중에서는 석양이려니 하면 금시 농밀한 어둠이었다. 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의 손을 꼭 잡았다. 빨리 가자는 재촉보다 밤이 오더라도 피차 무서워하지 말자는 뜻이다. 우우~으으흥 어둠과 함께 늑대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엉부엉 울던 수리부엉이가 토끼를 쫓는지 푸드덕하고 날았을 때는 흠칫했다. 이제는 길도 보이지 않아 뽀드득 달빛에 반사되는 눈밭만 밟는 소리가 빨라진다 했을 땐 드디어 정상이었다. 대낮이라면 고갯마루에 쉬어라도 가겠으나 이 밤에는 만용일 터, 여느 때 같으면 벌써 연산관에 짐을 풀고도 남았을 시각이다.

메스트르 신부가 탈이 난 지도 대여섯 시간이 되어갈까 걸음이 한결 빨라진다 했다.

“끄억…으 시원타!”

“신부님, 지금 트림하신 거예요?”

“오우, 트림이 아래쪽에서도 나오려고 하네!”

“속이 진정된 거네요?”

“봐아, 걷는 게 최고라니까!”

목소리에 생기를 찾은 듯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최 부제 밤길 걷는 거 무섭지 않아, 귀신 같은 것 안 무서워?

네, 저는 어딜 가도 북두칠성 옆 아버지 별 어머니 별 김제준 아저씨 별 그리고 몇 달 전부터 저 유난한 별이 지켜주는데요. 귀신 같은 건 벌써 졸업했어요. 열 살 첫영성체 받고 맞이한 성탄 자정에 떡 한 덩이 들고 한참을 내달았더니 어른들이랑 완전히 멀어진 거예요. 우리 동네 초입엔 왕 씨가 목맸다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애들은 근처도 못 가요. 저도 걸음아 날 살려라 했을 텐데 그 성탄의 밤에는 무섭지가 않은 거예요, 나무를 만지며 유유히 별을 봤다는 거 아녜요? 어린 맘에도 무섭지 않게 되었다는 게 어찌나 벅차던지 거룩한 아기 눈망울 같은 별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뒤론 귀신 같은 것은 괜찮아요. 문젠 맹수지요 맹수. 앞으로 조선에 들어가도 계속 밤길일 텐데….

최 부제, 아니래. 중요한 건 운이래 운! 굶주린 녀석을 만나면 방법 없다는 거지. 나무에도 거의 수직으로 뛰어오르고, 수영도 잘한다는 거야. 그러니 제발 배불린 녀석만 만나길 기도할 뿐이지.

“그런데 신부님, 지금… 너무 조용한 거 아니에요?”

“글쎄… 늑대소린 어디 갔지?”

오가던 대화까지 귀엣말이 되었다. 정말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을 따라오던 우우~으으흥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무슨 연유일까? 둘 중의 하나일 터, 다른 방향으로 틀었거나 아니면 쫓아오던 발톱을 급작스레 멈춘 것이다. 진즉에 노출된 체취를 따라오던 늑대들이 울음마저 그쳤다면 무슨 일인가? 양업은 메스트르 신부를 똑바로 보았다. 그 역시 동감의 표시로 고개만 까딱한다. 그렇다면 이를 어쩐다. 늑대들도 물러설 강자, 이런 큰 재라면 얼마든지 대형 맹수가 도사릴 수 있다. 양업은 생각했다. 늑대를 제압할 수 있는 종이라면 곰, 표범 아니면 호랑이, 막 1월 초이니 동북 표범들의 짝짓기 철이기도 했다. 이 외로운 동물은 짝짓기 철에야 동종을 만나는데 꼭 요맘때였다.

양업과 메스트르 신부가 설마 설마하며 한 걸음씩 떼어보는 앞쪽으로 정말! 저만치 모퉁이의 공기가 이상했다. 아, 새소리 생물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 정지되었다기보다 긴장되어 있었다. 폭발할 것처럼 웅크린 밤공기 앞에서 신부님 잠깐 잠깐만요, 양업은 살며시 메스트르 신부의 손을 잡아 세웠다. 바로 오른쪽 계곡이닷! 건너편 푸른 눈동자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도깨비불 같은 것, 그 앞에서는 서둘지도 말아야 한다. 두 개의 심해색 눈동자는 대체 무엇일까? 꼼짝 않고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부근의 생명권을 장악하고 있다. 미간의 두 불빛 간격으로 보아 몸체를 가늠할 수 있겠는데 볼수록 헛갈리는건 아예 말도 안 되는 크기이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검은 언덕빼기는 애당초 일체를 불허하는 것이 있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도, ‘봇짐 속의 철필에 펜촉을 끼우면 은장도 크긴 되겠지.’도 아닌, 양업의 머릿속을 가장 먼저 스친 것은 새끼양이 사자와 노는 이사야의 대목이었다. 감히 맹수야 안녕!이라고 입도 떼지 못할 상황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조선의 산세도 못지않은데. 그런데도 특별한 비결은 없을 것, 그때마다 넘기고 벗어나는 수밖에. 이는 마치 쓰러질 지경에도 한 발을 더 떼어보는… 그렇게 고비 고비 넘겨보는 것과 한가지다. ‘맹수야, 그리 먹을 게 없어 나같이 모진 신세를 노리느냐. 고된 걸음을 엿보느냐. 그래. 오지마라, 소명이 있는 몸이니.’ 철필에 날카로운 펜촉을 연결하니 한 뼘 되는 호신용이 되었다. ‘맹수가 보기엔 우습겠지만 나의 오른손은 결정적인 곳만을 향할 것이다.’

그때였다!

“크르렁!”

아니, 그쪽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벼르고 있던 오른쪽 계곡 건너가 아니라 왼쪽 산기슭이었다. 어른 세키 이상 되는 까마득한 바위 위에서 사뿐 뛰어내려 10미터 전방을 막는데 크르렁 소리 하나에 신경이 마비될 것만 같다. 아니 호랑이는 아니었다. 달빛에 어른대는 반점이 호랑이도 아니라면 무엇이 저리 크단 말인가, 아무르 표범이었다. 혹한 속에서 장대하게 진화한 동북 표범은 남방 호랑이와 붙어도 물러서지 않은 거대 종, 육으로만 본다면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조물인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 우리가 영장인 이유가 있지.’ 이런 생각은 할겨를조차 없다.

“크르렁!”

그치가 한 번 더 노려볼 적에 메스트르 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자네는 창창하고 조선교회도 생각해야 하니 내가 앞서겠네.

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의 손을 뒤로 당기며 더 앞에 나섰다. 자네는 창창하고 조선교회도 생각해야 하니 내가 앞서겠네.

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의 손을 뒤로 당기며 더 앞에 나섰다. 아녜요. 신부님, 젊은 제 뒤에 숨으십시오. Ave Maria 성모 어머니 빌어주소서.

오락가락하기는 맹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앞서거니 하는 데서 표적에 혼선이 온 것이다. 공격시점도 수정해야 했을 것이다. 단 몇 초가 몇 시간처럼 흘렀다. 그러나 먹잇감을 두고 꾸물거릴 맹수가 아니었다. 크르렁 하면서 앞다리로 튕겨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어으~흐흥!”

천둥 치는 소리, 아니 벼락소리는 고음이기라도 하지 귀에도 안 들리는 저음이 계곡을 통째로 흔들며 그 사람 내장부터 울리는 진동에는 숨이 턱 멎었다. 아, 처음 오른쪽 계곡 건너에 있던 검은 언덕빼기 전체가 움직여 올랐는데 심해색의 눈동자에서 직사되는 섬광이 단번에 계곡을 넘어 두 사람의 뒤에 가있었다. 기절하면 안 된다, 산신령님있다. 집채만 하다고 하더니 설봉과 어울려 태산만 하게 솟았다. 와, 왕, 왕대였다. 동북고원의 자존심이요 위대한 혼이라고까지 불리는 시베리아 수컷 중의 제왕 왕대…. 일체 굉장하다는 생각조차 근절시킬 경악감이 죽음의 목전을 싸늘히 갈랐다.

“크르렁!”

“어으~흐흥!”

앵수지간은 바로 치명타를 날리지 않는다. 먹잇감을 사이에 놓고 두 맹수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는 것이 전신을 흔들어대는데야.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쯤 되면 아무르 표범도 물러나야 옳다. 아무리 장대한 동북 표범이지만 같은 환경에서 세계 최대 종으로 진화한 것은 호랑이도 마찬가지, 일대 일이라면 빤한 승부였다.

크르르렁, 이때였다. 조금 전 표범이 뛰어내린 기슭 까마득한 바위 위에서 또 한 개의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처음부터 표범쪽은 두 마리였을까. 큰 덩치로 보아 수컷인 모양이 짝짓기 철 암수가 있었고 교배 과정에서 호랑이 영역까지 들어온 듯했다. 곧 생기게 될 새끼 생각에 암컷 쪽이 먹이를 밝혔으리라.

양업은 묵주를 잡았다. ‘misericordiarum pater! 자비로우신 아버지, 당신의 자비 때문에서라도 결국 좋이 해주심을 믿나이다.’ 늘 하던 기도부터 나왔다. ‘영원히 희망할 수 있으시니(semper in aterum sperabo),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끝내 제 순한 낯빛을 잃지 않나이다.’ 라틴어까지 막 나왔다.

그때였다.

“…이…이…제…이!”

샤르르륵 머리 위로 날리는 눈가루였다. 호랑이 한 마리와 표범 두 마리의 포효가 소나무 잔가지를 털며 흩뿌린 그 새하얀 눈가루는… 마치 이렇게 속삭여 준 것 같았다. …이…이…제…이.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하라! 양업은 날리는 속에서 자비로우신 분의 상도 본 듯하여 순간, 마음이 느릿해졌다. 그러자 머리는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느 맹수를 어떤 식으로 물리칠까. 그래 동북고원의 자존심을 건드려 보자. 그 위대하다는 것을 자극하자. 지상 최대 최강 최고라는 ‘최’자를 건드려 보자며 되레 태산만 한 왕대 쪽으로 피하는 척했다. 그래도 한 마리 쪽이 수월하지 않겠냐는 인상을 호랑이 쪽에, 사색이 된 공포는 표범 쪽에 흘리면서. 이제 거리상으론 한 발만 떼어 아가리에 넣으면 되었으나 왕대는 코앞의 먹잇감은 보지도 않는다. 아직 인간 세상이 나를 모르는군, 하는 투로 흘기다가 바로 표범 쪽만 노려보았다. 한 마리이면 쉽겠지만 그래도 다 자란 두 마리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으…그 찰나 포효가 딱 그쳐버렸다. 멀어진 먹잇감에로 한 걸음 나오던 암컷이 용수철처럼 웅크렸는데 세 마리가 동시에 딱 그치자 주위가 고요해지긴 고사하고 그 섬뜩한 죽음의 빛 안에 완전히 싸이게 되었다. 도합 여섯 개의 푸른 눈에서 직사되는 심해는 눈보다 차고 달보다 시려 차라리 보지 말아야 할 색이면 했다.

“크르렁!”

“어으~흐흥!”

호랑이 쪽이 먼저 돌진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날아 앞서있던 암컷의 볼때기를 일격했다. 다른 발로 한 대 더 올려붙이려는 순간 수컷이 공중회전하며 호랑이의 코를 물어버렸다. ‘크르렁 어으~흐흥’소리가 아니다. 살육의 ‘카르이잉’ 원시의 ‘우으이잉’ 죽이고 죽는 맹수들의 몰강스런 소리는 몸 전체에서 마구 삐져나왔다. 오줌을 질질 쌀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마침내 호랑이가 제 코를 물었던 수컷의 모가지에 송곳니를 박았기 때문이다. 그 장대한 것도 사지를 떨며 버둥거렸다. 그러자 볼때기를 맞고 떨어졌던 암컷이 달려들어 호랑이의 눈동자를 물고 늘어지는데 이리되면 수컷의 숨통에 박은 송곳니를 빼내야 한다.

비린내 피비린내다, 하고 정신이 들었을 때 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의 봇짐을 바닥에 내버렸다. 넋이 나가 있는 손을 끌어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계곡은 얼어있어 건너는 건 일도 아니었다. 벗어나자 아래로, 조금이라도 연산관 쪽으로 도망치자!

그러는 사이, 산중호걸의 노호와 제2인자의 핏빛 포효는 더 크게 더 낮게 더 잔혹하게 쩌렁쩌렁 산등째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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