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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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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변문의 오후(7) 날짜 2015.06.08 16:59
글쓴이 관리자 조회 290

“보세요, 신부님. 저 앞이 봉황산이에요!”

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연산관에서 사나흘을 걸어 멀리 봉황산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봉황새가 앉은 모습의 산체가 크진 않았지만 평원 가운데 우뚝한 악산이고 수목 또한 울창하여 예로부터 요녕의 4대 명산이라 불렀다.

“어휴, 이제 산만 보면 무서워…. 죽다 살아났잖아!”

“조선 가도 산길에 밤길일 텐데요.”

“홍콩에 무슨 휴대 화양 없을까, 맹수 퇴치용 약품 같은 것?” “언제 호랑이 사냥꾼 좀 만나봐야겠어요. 아무튼…호랑이 건은 발설 않으셨으면… 그렇다고 안 다닐 산길도 아니잖아요.”

“내 말이!”

이심전심이었다.

“저 봉황산 동쪽 끝이 변문 마을예요.”

“책문이라고 하지 않나?”

“조선 쪽에서 그리 부를 거예요.”

“대건 신부도 몇 번이나 들렀다고 했지, 조선 의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변문에서 동지사 일행을 만날 수 잇을 거예요. 일단 연락원들 만나고 나서 움직이셔야….”

“그래야지…. 드디어 변문이구먼.”

눈앞에 봉황산이 보이자 없던 기운이 솟아났다. 한 달 전 소팔가자를 떠나 마침내 이틀 거리면 꿈에도 그리던 조선땅이었다. 봉황산 자락 소성읍인 봉성에서 변문까지가 30여 리, 변문에서 동쪽인 무인지대를 통과하여 단동까지가 110여 리였다.

압록강을 사이 두고 조선 의주와 마주한 단동은 안동이라 하여 동쪽 오랑캐인 조선을 잘 다스리란 뜻인즉 조선에서 보면 치욕적인 지명이 아닐 수 없다. 허허벌판인 단동은 평상시에는 사람도 매기도 전혀 없다가 조선 사신 일행이 들어오는 때만(해마다 음력 11월 24일이나 12월 5일 두 차례) 도깨비처럼 며칠씩 임시 시장이 섰다. 막 중국에 들어온 조선 물건을 사려고 북새통을 떨다가 또 한두 달 후 북경을 다녀온 일행이 귀국하려 할 때는 중국 물건들에겐 중국 장사치인 척을 하고, 중국인들에겐 조선 방물장수 행세를 하면 자연스럽게 암호를 부착한 밀사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

“동지사 들어왔나요?”

메스트르 신부와 양업은 먼저 봉성에 들러 점심을 먹으며 식당 주인에게 슬쩍 사신단 일행에 대해 물어본다.

기실 조선 천주교는 초창기부터 사신단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1600년대 초 북경의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는 학자의 자격으로 서양과학서를 펴냈고 그 편에 천주교 교리(천주실의)와 윤리지침(칠극), 성경주석을 부록한다. 소위 이 한문서학서가 사신을 통해 전래되면서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눈에 띈 것이다. ‘서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사신단 속에 역관이나 짐꾼을 심어놓고 서학 중심인 북경 천주교와 연락하다 마침내 중국신부의 영입까지 성공했다. 기해년 후 자격 심사가 까다로워졌지만 국경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메스트르 신부와 양업도 먼저 사신단에 있을 연락원을 만나려는 것이다.

“조선 사신단? 사흘 후요. 우리도 대목 준비해야겠네.”

사신단 일행은 적게는 100여 명에서 많게는 300명도 넘었다. 절반 이상이 장사치들인데 아무리 통행증을 발급받았더라도 무안지대에 출몰하는 마적 떼 탓에 군사들과 동행해야 했다. 조선의 인삼, 해산물 등을 북경에 내다 팔고 비단, 면화 등을 되사오면 두 달 넘는 다리품이 보상되었다. 청나라 상류층에서도 막 구경을 하기 시작한 양화중 비누와 유리거울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 손님들이 모두 모두 봉성에 묵고 가는 것이니 소성읍민들로서도 일 년에 두어 번 오는 특수였다.

“왜, 누굴 기다리시오? 사람 만나려면 변문이 낫지, 여기 오면 뿔뿔이 흩어져!”

“내일 변문으로 갈 참이오.”

“더 묶고 가도 돼, 한나절 거린데 뭐. 우리 위층이 여관이라우!”

“아니오, 노숙을 하더라도 미리 가있어야지요.”

“이 겨울에 무슨 노숙? 지독한 사람들이네.”

“가진 돈이 없네요.”

“병오년 박해였습니다.”

밀사 김 프란치스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변문에 나가 이틀을 노숙하다 드디어 그를 만났다. 오후 4시경, 빨간 복주머니와 흰 손수건으로 서로의 신원을 확인한 뒤 변문다리 밑을 찾았던 것인데 대관절 무슨소리,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밀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무슨 일인데? 말을 해보라고 말을! 메스트르 신부가 재차 추궁하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신부님이….”

“….”

“김대건 신부님이….”

“….”

“…순교하셨습니다.”

김 밀사는 양업 부제의 열굴을 볼 수가 없었다. 조선 교우들이라면 삼척동자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죽고 못하는 사이로 얘기됐으면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신영세자까지 그랬었다. 대건의 얼굴에서 양업의 모습이 겹쳐진다고, 대건에게 양업의 안부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대건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저 소팔가자에 있는 양업 부제님도 안 좋으신가?’할 정도로 둘의 우애야말로 박해시대의 보물이라고들 했다. 소년 중에는 순전히 그것이 부러워 신학교에 지망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런 양업 앞에서 대건의 죽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다. 한양을 떠나기 전부터 연습해 둔 것이었다.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 그러나 막상 입을 열어야 할 순간이 오자 전부 말해버렸다.

“새남터에서…9월16일 날…군문효수로….”

“….”

“아마 제일 많은 사람이 모였을 겁니다.”

“….”

“굳건하셨습니다. 차돌처럼 빛나셨습니다.”

“….”

“유해는 미리내에 안장된 거로 압니다.”

“….”

“최 부제….”

같이 듣던 메스트르 신부가 양업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밀사에게 더 물었다.

“뭐라도 남긴 말은?”

“회자수들 수고한다고. 이제부터는 자기 몫이라 했고, 그리고….”

“그리고?”

“업아… 먼저 가있을게!”

“업아?”

“부제님 아닐까, 우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양업은 비통했다, 아니 비통하지 않았다. 울었다, 아니 울지않았다. 하늘을 보았다, 아니 보지 않아도 가슴에 뜨거운 하늘 하나가 열리는 중이었다. 말하려했다, 아니 말 하지 않아도 수없이 외치고 있음이었다. 기도했다, 아니 기도하지 않아도 현존하심이 절로 솟구쳐 올라… 양업은 대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였다. 오히려 전보다 완전한 하나가 되어있었다.

“언제라고요?”

“9월 16일요!”

“으음… 그랬구나, 그래서 그 별이 빛났었구나.”

아버지 어머니 별 위에 전에 없던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 9월 중순쯤 아니었던가. 건아 너도 별이 되었구나. 그것도 무수한 별을 이끄는 별. 4년 전 여름 백가점에서 헤어질 때 그렇게 먹먹해 오더니, 눈물 같은 거야 나오거나 말거나이다.

“메스트르 신부님…괜찮아요. 전 슬프지 않습니다. 슬플 수 없어요. 지금 이 눈물은 슬플 때보다 더 슬플 때, 좋을 때보다 더 좋을 때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대건이… 지금 제가 뭐라도 해서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나오는 대로 읊습니다. 조시는 아니고요 축시가 될 겁니다.”

“….”

메스트르 신부는 대답 대신 양업의 손을 꼭 쥐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몇 년간 대건과 생사고락을 나누던 사이였다.

양업은 조선 쪽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바로 옆에 있던 메스트르 신부조차 간신히 들릴 소성을 마치 기도하는 소리 같았다.

잘 가시게

내 유일한 벗이시여.

이제는

이 외톨이를

이 외톨이를

내려다보아 주시게

거기서 먼저 지내시게.

가장 친애하는 동료

최고의 전우여

아니 안 오셔도 되네.

아니 안 내려다보셔도 되네.

영원한 너의 나는

나 안에서 너를 보네.

아니 나마저도 너 안에서 보네.

잘 가시게

앞서 가시게

우리 건아

우리나라의 천상수호자시여.

양업의 고별사를 숨죽여 듣던 김 프란치스코 밀사의 뇌리에 대건 신부의 치명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굳이 고개를 들어 변문의 황량한 벌판을 휘휘 둘러보게 된다. 대건 시부가 수시로 오갔을 혹한의 국경에 대고 속삭여진 양업 부제의 진혼이 김 밀사의 귀에는 이런 시구로 바뀌어 들렸기 때문이다.

알았습니다, 님이시여

그냥 마음만 굳게 먹는다고 되는 순교가 아님을

똑똑하지 못하면 순교하지 못함을

흠 없지 않으면 가납되지 못함을

순백의 영혼이라야 비로소 가함을

작은 것에 패하면 큰 승리도 얻지 못함을

삶보다 더한 궁리 끝에 얻어진 선택임을

감동이 아니라 오랜 실천으로 수놓아져야 함을

내리 겸손치 못하면 올려 현양되지 못함을

그리하여 사랑으로만 화답하여 나가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순교라는 것이

한 번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과정들이 있었음을

아흔아홉 다한 후에 백 번째 올라설 수 있음을

예전엔 불굴의 용기와 더운 열정만 알았지만

비로소 순교도 능력임을

주님의 용사 아니 주님의 현자시여

이제와 우리 후예들에게

그 의지는 물론 지성까지도

그 용기는 물론 인내까지

두 가지를 동시에 빌어주소서!

진혼시가 끝났을 땐 쓸쓸하고 텅 빈 동토 어디에선가도 뜨끈하고 달콤한 물이 흘러 외롭고 지쳐있는 밀사의 가슴에 가득 고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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