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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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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최양업(3) 날짜 2015.06.30 17:24
글쓴이 관리자 조회 254

정상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본다. 구룡 쪽과는 달리 이쪽으로는 탁 트인 망망대해다. 이렇게 바다를 볼 때마다 여지없이 밀려오는 회한이란 ‘언제나 겨레에 돌라갈 수 있나. 아직도 바다를 떠돌고 있다.’이다.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수평선을 보면서 가만히 있었고 상대방도 그러도록 내버려두자는 묵언이나 주고받았다. 아마 메스트르 신부님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 벌써 5년간을 조선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조선에 뼈를 붇을 거라고 했다. 프랑스인이면서 이미 프랑스인이 아니요 자신의 포교지 외엔 모든 곳이 타국살이라고 했다. 홍콩의 안정과 풍요 속에서도 입버릇처럼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뼈를 묻어야지….”하며 조선을 언급하셨다.

“최 부제!”

“네….”

“뭔 생각 하는지 맞춰볼까?”

“신부님, 홍콩 점쟁이 되셨어요?”

“언제쯤 조선 들어갈까 했지?”

“어디… 저만 그런가요?”

“그런데 최 부제!”

“네!”

“자네…사제품…언제 받을 것…같나?”

메스트르 신부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걸 제가 어찌 알아요, 신부님이 더 잘 아시지? 에이, 제일 아픈 곳을 찌르시네.”

삐죽거렸을 입을 보고 괜한 얘기를 꺼냈다고 당황하시는 분에게는 아주 속상하진 않아요, 뜻이 있겠지요, 라는 말을 해드리고 싶다.

“맞아, 그건… 본인이 더 모르는 법이지!”

“신부님이 주교님 될 때나 받을 수 있으려나 원?”

“야 야…그러다 돌부처 되고 말지! 허 허!”

메스트르 신부님은 농담이라도 주교 된다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종신부제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말게.”

“제가 사제품 받으려면 조선 페레올 주교님한테 받아야겠지요?”

“꼭 그렇지만도 않네. 소속 교구장의 위탁만 있으면 어떤 주교한테든 간능하지.” “우리 주교님한테 받으면 좋겠어요.”

“거야 정상일 때 얘기고. 아직 병오년 수습도 못했을 게야.”

마침 구상 하나가 떠올랐다.

“신부님, 6월 말이면 보고서가 마무리될 것 같아요.”

“대단하네! 그렇게 들이파더니….”

“에이… 같이 했으면서요!”

“그런데 6월 말이면 다 끝난다는 그 말투는….”

“끝내자마자….”

그에게도 이심전심의 빛이 떠오른다.

“어? 자네도 그 생각인가?”

“네, 저야 그 생각뿐이지요.”

“그래 그래, 내 한번 알아봄세…. 듣기에 칠월 초에 조선으로 가는 군함이 있다던데? 라피에르(La Pierre)선장이라고…. 세실 함장과도 알지.”

“6월까지 보고서 마치고 칠월에 뜨면 딱이네요,딱!”

시선은 다시 먼바다로 돌려지고 있었다. 대건의 옥중편지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서해를 통한 조선 입국을 제안했는데 특히 5도 부근엔 중국 배도 드나들 수 있다니 꼭 한번 가볼 일이다. 대건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요새 답답하지? 젊은 사람이 맨날 책상 앞에서만.”

“글쎄요,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엔 장렬하게 순교하는 것이랑 일상의 어려움들을 견디는 것이랑, 같은 일이 아닐까해요.”

갑자기 메스트르 신부님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래! 그게 바로 자네의 강점이지, 페레올 주교인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자네의 그 점을 적극 지지하네.”

“무슨, 적극까지나요?”

“아니 아니야…. 자네 같은 영성도 꼭 필요하다는 말이야. 언제까지나 박해시대만 있는 건 아니지. 이다음… 신앙의 자유가 오면 그때 나타날 적수는 더 까다로운 상대일지도 몰라.”

“그럴까요?”

“우리 프랑스 좀 봐 봐! 박해시대의 적수는 보이기라도 하지, 자유로운 시대는 보이지도 않아. 맨날 보고 듣는 ‘생활문화’에 스며있기 때문에, 얼마나 반복음적 문화가 판을 치는지 몰라. 분멸한 선을 긋지 않으면 파수꾼인 우리마저 휩쓸린다니까? 박해 때는 ‘저기 먹구름이 끼었구나.’ 파악이라도 했지, 세속화돼 버리면 분간도 잘 안 돼!”

신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던 교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나는 어느새 학생으로 돌아가 숨을 죽인 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사제가 된 이유, 사제가 되어서도 위험한 지역을 지원한 뜻을 짧은 몇 마디 안에 심어주시려는 듯하였다. 어조가 바로 그랬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박해시대의 영웅은 순교자이겠지만, 신앙의 자유가 오면 가장 평범한 사람이 진정 영웅일 게야.”

“…."

슬쩍 메스트르 신부님의 얼굴을 보았는데 전에 없이 상기되어 있다.

“박해시대의 십자가는 칼날이겠지만…."

신부님이 마른침까지 넘기는 바람에 나도 한 걸을 다가서야 했다.

“자유로운 시대의 십자가는 어쩌면 자기 자신 하나 잘 견뎌내는 일일지도 몰라.”

“네에.”

“거창한 희생이 아닐지도 몰라. 어차피 생로병사 소멸되어 가는 스스로를 잘 받아들이는 일, 보잘것없는 일상의 편린들을 감내하는 일인지도 몰라.”

“그렇군요.”

“나 좀 봐, 이 흰머리….”

“조금 늘긴 했어요!”

“조금이라니? 아예 백발이지. 요샌 비춰보기도 민망하다니까. 예를 들어 백발을 고이 받아들이며 흠 없이 늙어가는 일, 그러면서도 따뜻이 세상을 사랑해 가는 일, 이런 게 증거라 불릴 날도 오겠지.”

“가난해지라는 말씀 같은데요?”

“역시, 최 부제는 하나면 둘을 안다니까. 맞아! 노약해 간다는 것도 인생의 가난이지. 난 말이야! 이 가난과 정결과 순명을 드리는 것도 일종의 순교행위라고 봐요. 박해가 끝나고 나중에는… 인간관계 안에서의 자기 낮춤, 사소한 양보, 먼저 건네는 인사, 화해, 섭섭해도 넘어가 주기, 또 재미없어도 함께해 주기, 맨날 계속되는 빨래와 설거지, 잔병치레와 권태 같은 일상의 너저분한 것들을 기쁘게 살아내는 것… 이런 것도 일상의 작은 순교라고 볼 거지.”

“열심히 일하는 것도요?”

“물론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 일 때문에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 이 모두가….”

“신부님, 이쪽에 조예가 깊으셨나 봐요?”

“응…우리 전교회 중에 일단 위험한 지역엔 안 내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사에서 우선 탈락되는 사람들…. 그 첫째가 뭐지 알아?”

“뭔데요?”

“소영웅주의에 빠진 사람, 자기가 순교라도 할 것처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 생활도 못하고 순교도 못해. 일차로 추려내지.”

소영웅주의라는 말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파리 근교 수녀원에 팔순 수녀님이 있었지. 한 사제가 만나러 오더니 다른 신부도 오고, 점점 늘어나 나중엔 몇십 명이 오는 거야. 옆 교구의 주교님도 오셨고.”

“대갠 수녀님들이 영적 지도를 받는데….”

“그렇지. 사제가 고해동 주고 그러지, 근데 반대로 성직자들이 오는 거야.”

“왜요?”

“몰라, 왠지 평안하드래. 이이가 뭐하는 이냐? 나이 스물에 수녀원 들어와 육십 년을 주방 한구석에서 감자만 까오던, 제일 재능 없는 수녀라는 거야. 동기들은 본당에 병원장에 박사에다 총장까지 해먹는 동안 감자만 까다 수도생활 다 보낸 일명 ‘감자 까는 수녀’래.”

“네에….”

“신부들이 만나 뭐하느냐? 그냥 감자 까는 거 구경하다 몇 마디 나눌 뿐이라는 거지. 근데도 향기가 밴다는 거야. 하루는 젊은 신부가 물었대. ‘평생 한자리에서 감자만 깠는데 지겹지 않으세요?’ 그 수녀님 왈 ‘아니에요, 감자가 하나하나 다른 대답을 하는걸요?’ 손으로도 기도할 줄 아는 분이었지. 나중에 들으니 그 구석에서만 수녀원 내 갈등들을 다 들어왔다는 거야.”

“꼭 피를 흘려야 증거는 아니네요?”

“내 이야기가 그거지! 신앙의 자유가 오면 ‘작은 꽃’영성이 필요할지 몰라.”

“작은 꽃이요?”

“숨은 꽃이라도 좋고, ‘깊은 산비탈 인적 없는 바위틈, 남몰래 핀 작은 아기꽃,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나는 좋다네. 내 님만 해님만 보신다면은 향 가득 피어있으리오.’ 뭐 이런 뉘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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