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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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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소팔가자의 낮(3) 날짜 2015.04.13 17:10
글쓴이 관리자 조회 222

양업은 여기까지 생각하다 갑자기 선생님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니들 잘 들어봐!”

“야 지금부턴 최 선생님이다, 징징이 잠자코 들어!”

첫 번째로 신학교를 지원한 학봉이가 주위를 정리하고 나섰다.

“신학교 규칙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자주 셋이, 때때로 홀로, 둘은 결코 아니!’ 아마 천 년도 넘는 전통일 거야. 세 명이 산보하며 묵주기도 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거지. 둘은 왜 안 되느냐? 괜히 의기투합되면 엉뚱한 데로 빠져 밤이나 주워먹기 좋기 때문에 셋이 좋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삼위시잖아. 얼마나 사랑했으면 셋이면서 하나시겠냐?”

“으, 또 지겨운 삼위일체 교리시간이다.!”

“징징이 가만있으라니까, 부제님 계속하시지요!”

“대개 셋 중에서 둘이 친하면 한 명은 어떻게 돼요, 괜히 이상해지지. 왠지 소외되는 것이…인간적인 사랑법이지. 그런데 삼위일체 사랑은 갑과 을이 사랑하면 옆에 있는 병까지 덩달아 충만해지는 사랑이야. 삼각관계가 아니라 갑과 을이 삼자인 병을 통해 하는 사랑이지.”

“삼각관계가 뭐예요?”

“징징이 끊지 말라니까? 나중에 여쭤봐!”

“응…그거는 이기적인 거지.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사랑 자체를 기뻐하니까, 굳이 자기한데 말 걸어오지 않아도 함께 하는 거지. 또 갑이 을과 이야기해도 병을 중심에 놓고 하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지 않는 거고.”

“뭔가 멋진 것 같다.”

사실 소학교 6학년을 데리고 하기에는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도 진정성은 전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부제님은 앞으로 이런 사랑을 하고 싶어. 사심 없는 공동체적인 사랑!”

“아요, 거짓말!”

“뭐가?”

“부제님, 김대건 신부님과 단둘이만 제일 친하잖아요?”

“아니야…”

“그럼 누가 또 있어요?”

“최방제 프란치스코!”

“어디 있는데?”

“하늘나라….”

“아…

“사실 대건 신부님 얼굴 속에 나도 있고 먼저 간 친구도 있고….”

양업의 눈매가 약간 그래졌을까, 주변이 숙연해지는 것 같았다. 9년 전 최방제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부터 대건과 양업은 부쩍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둘이 하늘의 방제를 만날 때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손 놓지 말자.’했다. 말하여지지 않아 더 견고한 그것으로 말이다.

“최 부제님, 아니 최 선생님! 오후에 체육식간입니다.”

신학교 쪽에서 뛰어온 소신학교 중급반 반장 해도였다. 양업은 성소담당 외에 라틴어와 교리, 체육을 맡고 있는데 반장이 대표로 온 것으로 보아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극성맞은 소학교 여자아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교보재는 뭐로 준비할까요?”

“서양식 체조 배우자. 그냥 운동장에만 나오면 돼!”

알았습니다. 해도는 꼭 반장다운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체육 선생님이자 선배인 양업에게 깍듯한 예의를 보이고 총총 기숙사로 사라진다.

“유징징, 그런데 왜 그러냐? 해도 오빠, 해도 신학생님 오니까?”

또래 여자아이들의 날카로운 눈빛은 속일 수 없나 보았다. 징징이 새침해진 것을 금세 간파한 것이다. 이번에는 양업도 짓궂게 나갔다.

“징징이 너, 해도 신학생 좋아하는구나?”

“아요, 부제님 좋아하긴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요?”

댕기 머리 한 여자애가 껴들었다.

“작년엔 너, 부제님만 좋아한댔잖아?”

이럴 때는 가까운 친구가 가장 커다란 적이다. 그 부그러운 비밀을 죄다 공개한다.

“옳아, 이제 늙었다고 무시하는구나?”

“아요… 몰라요!”

징징이답지 않게 말문이 막히자 주위는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하!하! 수업시간도 되었고 양업은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몰고갔다.

“해도는 이제 신부님 될 거야. 계속 좋아하려면 징징이도 수녀님 되든지. 그러면 하늘을 가운데 놓고 갑을병 삼위일체 사랑이 가능하지.”

“내일 봐요, 부제님!”

“응…. 짜이찌엔!”

막 점심을 먹은 범 요한이 이를 쑤시며 성당을 질러 신학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이들 속에 묻혀있는 양업을 보고는 자동으로 걸음이 멈추어졌다. 부지불식간, 그는 병아리 떼 속의 암탉 같은 양업이 본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누가 만일 임시직인 자기를 하루아침에 부제까지 시켜준단들 양업처럼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한결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되밀리자 쓰게 머리를 흔들며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러면서 바로 떠오른 얼굴이 양업과 여러 대조를 이루는 김대건 신부였다. 대건 신부 같으면 저토록 귀여운 아이들과 어떻게 지낼까를 상상하며 은근히 자신의 성격을 양업과 대건 신부의 중간쯤에 놓아보지만 그건 뿌연 안개처럼 궁색한 정체성이었다. 범 요한은 아직 아이들 눈 속에 빠져있는 양업을 보면서 작년 여름 완푸서부터 한 번도 몸에서 떼어본 적이 없는 십자 목걸이를 만졌다. 그때, 전에 없이 상기된 낯으로 목걸이를 주며 간청이라는 걸 해왔던 사람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를 떠 올리는 범 요한의 손이 옷 박에 만져지는 목걸이에서 한동안 떠나질 않았다.

긴 봄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어린이들이 돌아간 이 시각이면 교우들도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교구는 재정상 따로 신학교 경당을 짓지 못하고 본당과 공용했는데 새벽 6시부터 8시까지, 오후 5시부터 6시까지는 신학생들만의 차지였다.

오후 체육을 해서인지 성무일도 합송 후 묵상기도에 들어가자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워낙 나른하기도 한 봄날 오후, 왕년에 양업도 겪은 일이지만 졸릴 땐 얼마나 졸려오는가. 눈꺼풀이 천근만근 거부할 수 없는 잠이 쏟아진다. 하늘을 만나려는 시도가 묵상인데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나 만나는 것이다. 심지어 갓 입학한 학생 하나가 집에 편지 쓰기를 ‘어머니, 신학교는 취침시간이 두 번입니다. 한 번은 밤중에 침실에서 자고 한 번은 아침ㅂ터 성당에 앉아 잡니다.’ 이 신입은 아침 묵상 때마다 잤다는 이야기인가.

조는 모습 또한 천태만상이니 여기에 우스갯소릴 조금 친다면 중급반 2-3학년까지는 천주교 성인인 이냐시오 묵상단계, 계속해서 머리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하늘 말씀 마땅하고 옳은 줄 아오.’금방 표시가 나니 초보다. 고급반이 되면 요령이 늘어 바오로 단계가 된다. 바오로는 한 번만 크게 회개한 분, 감쪽같이 졸다가 박을 듯이 머리를 떨어뜨린다. 대신학생 정도면 베드로 단계에 이르는데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 졸기는 분명 조는데 돌덩이처럼 미동도 안한다.

“으어….

한 신학생이 얼결에 소리를 흘리자 고 주변 공기만 급팽창되는 것은 무슨 일일까, 혹시 저 신학생 존 정도가 아니라 잠을 잤는지도 모른다. 꿈까지 꾼 것은 아닌가, 깊은 물에라도 빠졌는지 손을 허우적거렸던 것 같다. 그걸 보면서 주위가 웃음을 참느라 공기만 터질 듯해진 것이리라. ‘그래 괜찮아. 밖에 있으면 좌충우돌할 시기, 사제 수업 자체만으로도 기특하지.’ 양업의 눈에 그렇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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